660년 백제 멸망후 왜로 넘어간 사람이 30만명에 이른다.
천도: 큐슈 - 오사카 - 나라 - 공인경 - 교토(평안경,794) - 오우미 (동경)
- 도읍,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경, 경사를 사용한다.
일본어의 모체는 백제어 이다
- 백제와 신라는 각 백제어와 신라어를 사용했다. 같은 언어였고 방언의 차이가 있었다.
일본으로 간 백제는 백제어를 승계하였고,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신라어가 현재 한국인의 모체이다.
- 오진왕 시대,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한학을 알리는 한편, 태자의 사부가 되었다
- 아직기(왕자): 오진왕 시대에 말 2마리(암수)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 | 1985년 다나베 우이치 논문
-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무렵, 한반도에서 '야요이시대'(BC3 - 3세기 시대 한국인)이며, '고분인시대'(4~6세기 시대 한국인)등 도래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 일본 고분시대는 한반도 도래인이 묘제를 전해줌으로서 시작되었다. (시체를 산이나 바다에 버림)
- 고분인 시대부터 무덤에서 유물이 나온다 | 일본에 문화를 심었다.
- 1993년 '일본문화의 기원' 논문
'일본 천연기념물에 4가지 개가 있는데, 유전자분석 결과, 일본개의 조상은 한반도의 진도개, 제주견'
일본 최초의 베틀은 백제로부터 건너갔다 (왜에 옷을 입힌 것이 백제이다)
- 와사카 백제왕 신사 근처 '라시스쿠리'에서 백제 베틀이 나온다. (5세기 초 유물)
- 제봉사도 5세기 오진왕(응신왕) 시대에 백제로부터 건너갔다.
일본내 신이된 백제인
- 성왕 사당 | 히라노신사
일본 최초의 역사기록: 고사기(712년) | 태안만려(오노야스마로) , 백제인이 씀.
- 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한 책
일본서기 (720년)
일본 고지도: 난파팔랑화도
- 11세기 말 일본에서 만든 백제지도, 오사카 지도
- 평야천 (원래명칭: 백제천, 히라노가와=구다라가와) , 백제야 (백제벌판, 구다라노) , 히라노가와(구다라가와), 구다라스(백제국, 주는 나라, 국가라는뜻)
- 난바: '어려운 물결을 헤치고 건너와 터를 잡은 터전이라는 뜻', 지금의 오사카의 중심지, 고대에는 백제의 왕실이 있었던 지역
- 도톤보리: 고대 백제인 왕족 '나리야스 도톤'이 주도해 만든 곳
- 천수각: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백제인이며, 간무천황 때 무인으로 헤이안시대 정벌 전쟁에서 활약), 종3품까지 올라 사카노우예씨의 지위를 크게 격상시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 1536-1598년
- 일본의 무장, 정치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 중 사망
- 1592년 직전에 백제관련 기록이 사라진 것은 조선침략을 위한 의도적인 역사왜곡을 하였다
1889년 다시 백제기록이 없어진다.
- 1886년 명치유신 이후, 군국주의로 변한 일본은 다시 백제의 흔적을 지워 나감
- 백제 기록이 사라진후에 오사카에 북백제촌과 남백제촌이 생긴다. (현재 오사카 중심부이며, 백제역,백제버스정류장,백제대교,남백제 소학교가 있다)
아키히토 천황
- 2001년 12월23일 68회 생일, 기자회견 중 '내 몸에도 한국인의 혈연이 있다'라고 공식적으로 표현을 함
- 2004년 8월5일: 일본 왕세자(아사카노미야), 공주 무령왕릉에 제사를 지내고 일본 황실의 향과 향로를 공주시장에게 기증함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
다이카 개신
율령제 성립
불교문화 발달
일본국호사용
귀족중심문화
불교문화발달
장원발달
무사형성
가나문자
쇼군: 미나모토씨 1192-1333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이다.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씨가 쇼군으로서 3대에 걸쳐 다스리고 그 후부터는 싯켄인 호죠씨가 다스렸다. 그 후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를 거쳐 약 700년 동안 무가 정치가 이어졌다.
쇼군: 아시카가씨 1338-1573
1336년에 시작된 무로마치막부는 3대 쇼군이 아시카가 요시아키에 이르러 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자 상공업자들이 마치 소로에 점포를 차리기 시작했고 15세기에 이르러 교토는 상업도시의 일면도 갖게 되었다. 인구가 증가한 교토에서는 도시 재편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6세기에 나조 대로를 경계로 해서 북으로 가미교, 남으로 시모교라는 두개의 커다란 공동체가 생겼다. 이대로 교토는 계속 발전해 나가는 듯 했지만 1467년에 유력 다이묘와 막부 쇼군 사이에 벌어진 정쟁을 계기로 오닌의 난이 일어났다. 10년 이상 계속된 이 내란으로 귀족과 조정관료, 무가의 집들이 몰려있는 가미교는 폐허가 되고 100정 3만호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상공업자가 많은 시모교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일본 통일을 꿈꾸던 영주(다이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쓰러진 후 그를 모시던 도요토미 헤데요시가 1590년에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그 뒤 도요토미는 황폐해진 교토를 대대적으로 부흥시켰다. 교토의 구획은 바둑판과 같은 정사각형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때 구획을 분할하면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 구획이 만들어졌다. 정권을 장악한 에도막부는 교토에 니조성을 쌓고 막부의 직할지로 삼아 산업을 보호했다. 고급비단인 니시진오리 산업을 극진히 보호한 것이 교토 진흥의 핵심이었다. 교토의 거상인 스미노쿠라 료이는 고토와 후시미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었는데 이 덕분에 오사카부터 요도가와강을 경유해서 물자를 교토시내로 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교토는 인구가 35만명까지 증가하여 에도, 오사카의 뒤를 잇는 도시로 발전했다.
일본 전국시대 '두견새 고사'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거든 죽여버려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안 울거든 울게 만들어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쇼군: 도쿠가와씨 1603-1867
막부시대 말기의 교토는 개국을 추진하는 막부와 존황양이파 조슈번의 여러 무사 및 지사의 격전지가 되어 치안이 악화되었다. 1864년에는 막부군과 조슈번의 군이 황궁 부근에서 충돌한 금문의 번이 발생하기도 했다. 1867년 에도 막부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에도막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 신정부군과 구막부군이 교토 교외에서 충돌하며 보신전쟁의 서막을 여는 도바 후시미 전투가 벌어졌다. 보신전쟁은 왕정복고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와 옛 막부세력 간에 벌어진 내전이다. 보신전쟁에서 승리하고 에도성에 무혈입성한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는 수도 이전 논의를 본격화했다. 결국 에도막부 시대의 관청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해서 에도(도쿄)를 수도로 선택했다. 1868년에 마침내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후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온 일본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쿄토는 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모면하여 천년의 수도를 지니고 있다.
메이지천황은 도쿄로 천도한 이후 교순이 머물던 에도성을 그대로 궁전으로 삼았다. 천황이 머무는 궁궐은 황거 즉 고쿄라고 부른다.
메이지천황은 에도성을 접수하고 도시 이름을 도쿄로 바꾼다.
칠지도
11대 스이닌천왕 | 이쿠메이리비코이치사노미코토
기원전29-70 (99년) | ~
-
12대 게이코천왕 | 오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노스메라미71-130 (59년) | ~
-
13대 세이무천왕 | 타라시나카츠히코스메라노미코토
131-190 (59년) | ~
-
14대 주아이천왕 | 타라시나카츠히코스메라노미코토
192-269 (77년) | ~397
-
야마토 시대 | 년 (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15대 오진천왕 | 호무다와케노미코토
270-310 (40년) | 397~
- 호무다와께 = 공주성주 | 본명은 '진예' 이다.
- 396년 고구려의 공주성 전쟁에서 패하고 일본으로 넘어가 397년 일본에서 나라를 세웠다.
- 실제 일본의 최초 천황
- 토착세력과 싸울때 모노노베 조상 니기하야히가 이바지한바, 백제 동족임을 알고 나가스네 매부를 죽이고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공로로 모노노베 씨쪽이 선대구사본기(유일한 족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 396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어려운 고비를 맞고 백제 세력은 왜로 뻗게 되었다. 그곳으로 명명한 확고한 집안 곧 호무다 와께의 집안과 고 확고 집안이 차지한 땅에 백제 다무로가 들어선 것이다.
- 400년에는 백제가 가야,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를 구원하러 온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였다.
- 403년 왜와 가야를 끌어들여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404년에는 왜, 가야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였으나 그 때마다 패했다. 왜, 가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청병사와 비슷하였다.
- 아직기(왕자): 오진왕 시대에 말 2마리(암수)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츠쿄'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오진왕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나은 학자가 또 있는가' 하고 물으니 '저보다 한참 젊은 학자가 백제이 있습니다' 아직기가 '왕인이라는 사람이 뛰어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박사를 불렀다.
오진왕16년(517) 2월에 왕인이 오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여러 경전과 서적을 배웠는데 막힘이 없었다.
-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한학을 알리는 한편, 태자의 사부가 되었다. 왕인은 천자문와 논어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백어제 = 일본어)
4세기말~5세기초에 천자문을 가져간 것인데, 우리가 사용하는 천자문은 6세기에 양나라 주흥사(502-549)의 천자문(하늘천따지)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천자문은 6세기 것이고, 왕인이 가져간 천자문은 시대가 다른 천자문이다. 그것이 한자와 일본어가 다르게 된 이유이다.
그 전의 천자문(천주현황-)은, 2세기에 위나라 종요(150-230)의 천자문이다. (4언고시)
'왕위'는 '종요'의 천자문을 가져간 것이다
일본 나라에 '동대사'에서 종요의 필사본이 나왔다.
일본의 문자문화는 백제로부터 건너간 것이다.
- 목간: 나무에 글을 써 끈으로 묵었다.
- 일본 종이: 서기 610년 이후임. 고구려인이 조이,머루,그림물감을 만드는 방법을 왕실에 전했다.
- 가라사비(삽): 농기구 삽, 가라는 한(당시는 백제)을 의미하며 사비는 삽의 일본식 발음
- 가나자와 쇼사부로(1872-1967) : 일본의 최초의 사전 광사림(1925) 일본고지명연구등을 지음,
가라사비= 백제의 삽 이라는 뜻
가라까미= 백제의 신 이라는 뜻
가라사오= 백제의 작대기, 도리깨
농기구의 표현에서 농사가 한반도로부터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 말,소,돼지도 일본에 건너갔다.
- 왕인을 서쪽(오사카) 글의 수장 '서문수'로 표현
왕인묘와 왕인공원이 있다. (일본 글의 아버지로 숭상) , 일본에서는 왕인을 '와니' 라고 부른다
- 아직기는 나라(야마토)의 수장 '동한수'로 표현
오진왕12년 '일꾼이 아쉽다' 하여 유즈끼가 120고을 사람을 데리고 오고 아직기가 오진 20년에 17고을 사람을 데리고 왔다.
- 백제왕인사: 왕인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
- 도기왕자(전지왕): 아신왕의 아들이다. 개발,국방,이민등 대왜와 백제 사이에서 조정을 맡음. 아신왕이 죽자 405년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420년 왜로 돌아왔다.
도기는 비유를 왜에서 낳고, 비유는 두 아들 가스리와 고니끼를 낳았다. 각각 왜왕 사이(안코)와 고오(유랴쿠)가 되었다.
오진천황 (응신왕): 397~
남바위: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쓰개(백제)
왕인
일본에 2C 종요의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갖다
16대 인덕천왕 | 닌토쿠천황 | 호오사자키노미코토
313-399 (86년) |
- 신공황후 (인덕천황의 어머니)
- 다이센릉 (세계3대릉) | 전방후원분 , 묘 길이 485m로 가장 크다.
- 난파진가(난바 나루터의 노래): 왕인이 인덕천황에게 비어 있는 옥좌에 오르라고 지은 시가, 매화송(바이카쇼우)이라고도 함
'난파진에는 피는 구나, 이 꽃이 겨울 잠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 57577 (음절)
= 꽃이 핀다는 것은 왕에 등극하다는 뜻.
-> 927년 키노 츠라유키는 고금집의 서문 카나서에 난파진가가 최초의 와카(시)라고 밝힘.
- 일본글자: 왕인과 아직기에 의해 만들어 졌다.
'일본어의 세계'(1980) | 오노 스즈무 논문
-> '일본 야마토국에 살던 아직기와 카와치국(오오사카의 왕도)에 살던 왕인의 유산으로서 중요하 것은 이 사람들이 위진 시대의 중국어 발음을 일본에 전했고 또한 한자로서 일본어를 쓰는 방법을 실행했다는 일이다'
언어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 4-5세기 시작 - 10세기 모듬이 되고 11세기에 완벽(48글자)해 진다. 적어도 500년 동안에 일본의 글자가 만들어 진다.
일본어는 카타카나,히라가나 두가진 언어가 있다. 이 일본어를 아직기와 왕인이 시작 하였다.
한자어를 만든 방법은
카타카나: 한자어의 일부분(보통 왼쪽 부방변만 씀)을 가져와 쓴 글자로 외래어, 의성어 등에 사용된다. 한자의 쪽을 띄어서 했다 (아에우에오)
가다카나 -> 카타카나(탁음)
히라카나: 한자어의 초서체를 기초로 하여 만자
히라가나 -> 히라카나(탁음)
초서체= 한자를 흘려 쓴 서체
일본어는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아직기와 왕인박자가 한자의 쪽을 띄어 간체화 한것이다.
난파팔랑화도 | 오사카의 고지도
17대 리추천왕 | 산 | 오에노이자호와케노미코토
400-405 (5년) |
-
18대 한제천왕 | 진 | 다지히노미즈하와케노미코토
406-410 (4년) |
-
19대 인교천왕 | 오아사즈마와쿠고노스쿠네노미코토
412-453 (41년) | ~427
- 비유왕과 인교천왕은 동일인이다
20대 안코천왕 | 아나호 | 사이
453-456 (3년) | 443-455
- 도기(전지왕)의 장남이다, 왜왕 '사이'
- 455년 백제 개로왕이 된다.
21대 고오 | 유라쿠천왕 | 오하츠세와카타케루노미코토
456-479 (23년) | 457-479
- 곤지왕 | 왜왕 고오(455-477) | 유랴꾸는 동일인이다
- 곤지왕이 죽은후 4명의 가짜임금(역사왜곡): 세이네이,겐조,닌켄,부레츠
- 개로왕은 458년 8월, 우평 여기를 우현왕(왜)에 임명하고, 좌평 여곤(곤지)을 행정로 장군 좌현왕(왜)에 임명한다.
고구려 남침(475)을 대비하기 위함.
- 다이센릉이 인덕천황이 아닌 곤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목협만지(소아만지)-소아도목-소아마자-소아입록
22대 세이네이천왕 | 시라카 -> 실제는 왜왕 '부' 이다
480-484 (4년) | 479-501
- 왜왕 '부'는 501년 백제로가서 무령왕(사마)이 된다
- 무령왕의 어릴때 이름이 '시마'이고 시마가 부 이다
23대 겐조천왕 | 오게스노메라미코토
485-487 (2년) |
-
24대 닌켄천왕 | 오게노스메라미코토 | 오오시
488-498 (10년) |
-
25대 부레츠천왕 | 오하츠세노와카사키노미코토
498-506 (8년) |
-
26대 계체천황(남제왕) | 게이타이천왕 | 오오도노 오오키미
507-531 (24년) |
- 계체천황은 곤지의 셋째아들
- 503년무령왕이 아우인 남제왕에게 장수를 염원하며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보낸다
- 513년 8월 무령왕(53세)의 아들 태자 순타가 죽었다
27대 안칸천왕 | 마가리노오오에노미코
531-535 (4년) |
-
28대 센카천왕 | 히노쿠마노다카타노미코
535-539 (4년) |
-
아스카시대 | 년 (년)
29대 흠명천황 | 긴메이천왕 |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
535-571 (36년) |
- 백제 성왕(523-554)과 동일인 이다
- 흠명천황은 23명의 자녀가 있었다.
- 긴메이천황 13년(552년) 불교 전래 | 삼존 아미타 여래를 선광사에 보냈다
- 소아씨의 딸을 긴메이천황에게 시집 보냈다.
30대 비다츠천왕 |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
572-585 (12년) |
- 스이코천왕의 남편
- 아들: 쇼토쿠태자
31대 요메이천왕 | 이케노베노미코
585-587 (2년) |
- 스이코천왕의 오빠
32대 숭준천황 | 스슌천왕 | 하츠세베노미코
587-592 (5년) |
- 스티코천왕의 이복남매
- 스슌천왕살해 | 중준천황5년(592) 소아 우마코가 동한직구에게 천황을 시해하게 하였다 .
33대 추고천황 | 스이코천왕(여) | 토요미케카시야 히메노미코토
592-628 (36년) |
- 의자왕을 키워줌
- 592년 풍포궁(소아입록의 증조할아버지 저택)에서 즉위식을 하였다 . 소아씨는 이곳을 아스카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다. 아스카는 소아씨의 본거지였다.
소아마자(할아버지) - 소아하이(아버지) - 소아입록
- 475년 한성백제 전쟁패배후 목협만치(소아만지)가 일본에 원병을 청하기위해 일본으로 갔다.
소아지역의 지명을 따라 소아씨가 되었다.
-쇼토쿠태자 | 574-622.4.11
쇼토쿠태자는 스이코천왕을대신해 섭정정치를 하였다. 불교문화를 반대하는모노노베씨와 불교전쟁을 하였다. 숭불파와 배불파. 소가노우마코와 협력하여 정치 하였다.
- 호류사(602-607):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절
- 593년 시텐노지(사천왕사)를 지었다 . 세상의 불리를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사천왕상을 새기고 이 싸움에 승리하면 사천왕을 안치하는 사원을 건립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겠다”고 맹세하였고, 승리 후 그 맹세를 완수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602년 내목황자로 신라를 공격할 장군으로 정하고 군사25,000명을 주었다
34대 조메이천왕 | 다무라 | 서명천황
629-641 (12년) |
-629년 의자왕이 서명천황으로 등극한다. (백제에 641년 의자왕으로 등극)
- 640년 백제궁, 백제대사를 만든다.
35대 황극천황 | 고교쿠천왕 |타카라노히메미코
642-645 (3년) |
- 제명공주, 사이메이 천황과 동일인이다.
- 645년6월12일 아들 중대형과, 중신겸족이 고교쿠 천황이 보는 앞에서 소가씨(소가노이루카) 목을 베어 살해하였고, 천황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 대화개신
중대형은 천지천황, 중신겸족은 부여 풍 그리고 천무천황이 된다.
중대형=여용=교기 동일인 이다
살해계획: 삼한에서 사신(백제왕이 보낸 사신)이와서 천황에게 표문을 읽는날 소아입록을 살해하기로 계획함
'중대형은 소아입록은 천황가의 자손들을 살해하려했고 천황가의 권력을 빼앗아 자기들이 황제가 되려고 합니다'
중대형과 중신겸족, 소가씨(소가노이루카) 살해
중신겸족 | 다이카캐신의 수수께끼
36대 효덕천황 | 고토쿠천왕 | 카루 황자 | 아메요로즈토요히
645-654 (9년) |
-
37대 제명천황 | 사이메이천왕 | 타카라노히메미코
655-661 (6년) |
- 제명천황 6년(660) '백제가 망하여 우리는 의지할 곳이 없다'
- 661년7월24일 사망 (의문의 사망으로 백제 부흥운동 전쟁참가를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피살 가능성 높음)
38대 천지천황 | 카즈라키 | 중대형
661-671 (10년) |
-
39대 고분천황 | 오토모
671-672 (1년) |
-
40대 천무천황 | 오아마 | 부여 풍(풍왕)
673-686 (13년) |
-
41대 지토천황 | 우노노사라라 |
686-697 (11년) |
- 천무천황의 아내 (여왕)
42대 몬무천황 | 카루
697-707 (10년) |
- 천무천황과 지토천황의 손자
43대 겐메이천황 | 아헤노히메미코
707-715 (8년) |
-
나라시대 | 년 (년)
44대 겐쇼천황 | 히타키노히메미코
715-724 (9년) |
-
45대 쇼무천황 | 오비토노 미코
724-749 (25년) |
-
46대 고켄천황 | 아베나이신노
749-758 (9년) |
-
47대 준닌천황 | 오이
758-764 (6년) |
-
48대 쇼토쿠천황 | 아베나이신노
764-770 (6년) |
-
49대 고천황 | 시라카베노 오오키미
770-781 (11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