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8년 - 660년12월3일 (678년)
- 금동대향로: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
한성시대 | BC18년 - 475년 (493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BC18- 28년2월 (46년) | 1대 온조왕 | 온조
- 제1대 백제국왕 (십제->백제)
- 주몽과 소서노의 둘째아들
- 9년, 마한멸망
28.2-77년 (49년) | 2대 다루왕 | 다루
- 온조왕의 아들
77년-128년 (51년) | 3대 기루왕 | 기루
- 다루왕의 아들
128년10월 - 166년 (38년) | 4대 개루왕 | 개루
- 기루왕의 아들
166년 - 214년 (48년) | 5대 초고왕 | 초고
- 개루왕의 장남
- 초고대왕 이래 160년부터 의자대왕의 660년까지 500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160년 초고왕자는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 이즈모에 건너가서 수진국의 왜여왕인 세오녀 히미코여왕을 사로잡아 일본 열도를 차지했다. 일본 히미코 즉 세오녀(가야인 연오랑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팔중성에 가두고 8명(아들5,딸3)의 자손을 낳았다. 이중 세오녀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메노오시호미이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구주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알알이이며, 알알이가 구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의 증조부가 스사노오(초고왕) 이다.
초고왕자는 다시 백제로 돌아와 초고왕이 되었다.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속고왕 또는 속고대왕이다. '신찬성씨록'에 유일하게 속고왕만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초고왕의 일본첫째왕자는 아메노오시호미(161년생), 일본둘째왕자는 첫째 신녀인 모치코가 낳은 아메노호히 와자로서 시마네현 귀족의 선조가 되었다.
셋째왕자는 아키코.하야아키쯔신녀가 낳은 아마쯔히꼬네로서 후쿠오카의 자성국조등의 선조가 되었다. 넷째 왕자는 미치코.오오미야가 낳은 이꾸쯔히꼬네이고 다섯째 왕자는 아야코 토요히메가 낳은 쿠마노쿠스비 이었다. 5왕자의 순서는 신녀의 순서다.
-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주몽검)를 규슈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주몽을 일본에서 쯔모왕이라고 했다. 초고대왕은 일본에 고주몽신사를 세워 고주몽 제사를 지내도록 주몽왕검을 보내준 것이며, 이는 히미코에게 왜국 왕권을 수여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주몽왕검은 일본의 삼보중에 첫째였다. 이 주몽왕검의 형식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우가미신은 백제계1대 대마도주 불합존이다. 동시에 단군시대 대마도주 언파불합이후로 51세 대마도주였으며, 그의 다른 이름은 야마토오 즉 왜남왕이다. (불합은 대마도를 의미한다) 1대 대마도주불합왕는 구수대왕인 대국주신의 권유로 대마도의 대산진신의 딸 타마요리히메를 이즈모로 초청하여 결혼하였고 이쯔세(184-238)를 낳았다.
대마도는 한개의 섬 이름이면서 실상은 두개의 섬이다. 파도 때문에 섬의 중간에서 아주 조금 합치지 못한 두개의 섬이지만 실상은 하나라는 뜻이 불합이다. (불합왕 = 대마도왕)
- 니니기(174-220)는 최초로 일본 천황이 된 신무천황(194-256)을 낳았다.
니니기는 구주에 와서 구수대왕의 후비였던 대마도의 해신 즉 오미미신의 딸 고노하나사쿠야히메와 결혼하여 칠삭동이 신무천황을 낳았다. 샤쿠야히메는 구수대왕의 세아들을 낳았었고, 네번째 아들이 니니기의 아들인 신무천황이다.
214-234년 (20년) | 6대 구수왕 | 구수
- 초고왕의 아들
- 구수왕은 초고왕의 딸인 수시리 공주와 결혼하여 일본의 대화에 진출하여 대국성에 살며 일본의 대국주신이 되었고 214년에 다시 백제로 돌아와 백제왕이 되었다.
구수대왕은 일본에서 귀수왕이다.
구수왕자는 초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를 정비로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나모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다스리는 오호쿠니누시가 되었다.
- 대국주신의 대국성은 오사카 대국정에 있었다.
234년 (1년) | 7대 사반왕 | 사반
- 구수왕의 장남
- 재위한 지 1년만에 폐위되었다.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이왕에 의해 폐위당함)
- 사반왕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효소천황이자 사대주신이 되었고 사반대왕의 딸은 신무천황의 비가 되었다.
신무천황도 초고대왕의 증손자이고, 신무천황비도 초고대왕의 증손녀다.
234-286년1월 (52년) 8대 고이왕 | 고이,구이,고모,구태
- 개루왕의 차남
- 활을 잘쏘고 무예가 뛰어났다.
- 풍납토성 축조
286-298년(12년) | 9대 책계왕 | 책계
- 고이왕의 장남
- 체격이 크고 사나웠다.
- 286년 위례성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대비해 사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
- 298년 한군이 낙랑과 맥인을 이끌고 침입했고, 백제가 패했고 책계왕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298-304(6년) | 10대 분서왕 | 분서
- 외모가 준수하여 왕위에 올랐다. 한군과의 전투에서 백제가 패하여 부왕이 사망하자, 어려서부터 왕위를 계승하였다.
- 한군에 강경책을 폈고 304년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경했을때 낙랑군 정예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304-344년(40년) |11대 비류왕 | 비류
- 구수왕의 차남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초고왕계가 왕위를 다시 가져온 것. -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 계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하여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 활을 잘 쏘았고 성품이 너그러웠다.
344-346년 (2년) | 12대 계왕 | 계
- 분서왕의 아들
- 계왕이 사망한 이후 고이왕통이 끊겼다
346-375년 (29년) | 13대 근초고왕 | 초고,구
-비류왕의 차남 | 석촌동 3호분
-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 364년 가야의 부족국인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해 야마토 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 366년3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368년 신라를 존경하여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 두필을 신라에 선물하였다.
- 남으로는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54개 부족국가)을 통일하였다.
- 369년3월 왜는 아라다노와케,가고노와케를 장군으로 감고 가야 탁순국에 건너가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훼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 왜는 군사를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가서 남만의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치 주장: 왜가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했다고 주장)이에 그왕인 초고와 왕자 구수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 369년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군, 구모로성)에 쳐들어오자, 태자 근구수를 보내 크게 무찌르고 5천명의 고구려군을 사로 잡았다.
- 371년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패수(예강성)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대방 지역을 점령하였고, 여세를 몰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름:쇠)을 전사시켰다.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꽃아 효수하였다.
- 372년에 근초고왕이 왜에 손자 침류를 왜왕으로 보내면서 그 상징으로 하사한 칼이 '칠지도'이다. | (칠지도와 칠자경)
현존하는 칠지도는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로 두번째 칠지도이다.
- 진나라때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였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귄의 땅을 점거해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주서백제전에 의하면, 백제는 동북으로 신라에,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 근초고왕의 즉위부터 20년(365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 때에 20년간 근초고왕은 무슨일을 했는가?
375-384년 (9년) | 14대 근구수왕 | 구수,수
- 근초고왕의 아들
- 369년 태자 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 정벌을 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 369년 고구려를 크게 무찌르고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려 했으나 장군 막고해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 라고 조언하자 그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다시 침입하자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 시켰다.
- 376년11월 고구려 소수림왕이 백제 변경을 공격했다. 근구수왕은 377년10월 3만명의 병사로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이상기후가 겹치면서 제1차 여제전쟁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대패 하였다.
- 379년4월 하루종일 흑이 비처럼 내렸다. 380년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5월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장이 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382년 봄에 가뭄이 들어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결국 국가창고의 곡식을 푸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384-385년11월 (2년) | 15대 침류왕 | 침류
- 근구수왕의 장남
- 384년에 왜왕 침류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다.
- 384년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7월에 동진에 조공하였다. 9월 동진에서 호승 마라난타가 들어왔고 이를 계기로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다.
385-392년 (7년) | 16대 진사왕 | 진사
- 근구소왕의 차남
- 385년 아신왕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 386년 고구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을 쌓게 했다.
- 389년과 390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달솔 진가모가 도압성을 함락 시켰다.
- 391년 7월 광개토대왕이 군사 4만명을 이끌고 북쪽 변경의 석현성등 10여성을 함락시켰으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군사작전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맞서 싸우지 못했다. 10월에는 험준한 요새지인 관미성도 함락 당했다.
- 390년 오진을 고마확고로 책봉한다 . 오진천황의 이름은 호무다 와께(본명:진예)이다. | 와께는 백제가 후황에 붙이던 호칭 내지 벼슬이다. 호무다는 지명이름 (고마->호무), 고마는 공주의 옛이름이다.
오진은 진씨이고 공주(고마)지역의 권력가. 왕족다음으로 권세가 막강한 진씨네 영토였다. 백제 왕족 여씨의 외척으로서 대대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후왕이었다. 후왕인 호무다 와께는 396년 광개토대왕이 고마에 있던 가바라(옛 공주) 성을 칠때 왜로 떠났다.
-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수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58개성을 공취하고 풍납토성을 포위했다. 백제는 출병해 맞서 싸웠으나 대패 하였다.
아신왕은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굻고 남녀포로1000명과 가는배 1000척을 주고, 광개토대왕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신하가 되겠소' 라고 하고, 고구려의 신하국이 되기로 맹세한다.(비문)
광개토 대왕은 백제왕을 죽이지 않고 조공만 받고 용서한다. 항복 시켜서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복의 왕.
- 397년 오진은 왜(대왜)에 나라를 세웠다. 443년즈음 진씨를 여씨로 성을 바꿨다.
- 오진천황 321-430 (재위기간 397-430) | 일본 최초의 천황
- 오친천황의 아들 인덕천황(닌토쿠천황)이 다이센릉의 주인이다.
하지만 다이센릉의 실제 주인은 유랴쿠천황(곤지)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업적)
(오진천황-인덕천황-리추천황-한제이천황-인교천황-안코천황-유랴쿠천황)
- 오진3년(399) 신하(키노쯔네수쿠네등)를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왕으로 세웠다. [일본서기]
그 동기는 391년 고구려 침공때 진사왕은 나라를 살피지 않고 사냥만 했기 때문이다.
392-405년 (13년) | 17대 아신왕 | 아신,아방,아화,아미
- 침류왕의 장남
- 393년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름 맡겼다. 진무는 1만의 병력으로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무너뜨리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394년, 395년 수곡성과 패서성에서 싸웠으나 번번이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ㅆ아현성을 쌓는등 전시 체계를 유지하였다. 398년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천문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중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징발하여 계속되는 군역으로 백성들이 주변 국가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감소하였다.
- 396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어려운 고비를 맞고 백제 세력은 왜로 뻗게 되었다. 그곳으로 명명한 확고한 집안 곧 호무다 와께의 집안과 고 확고 집안이 차지한 땅에 백제 다무로가 들어선 것이다.
- 400년에는 백제가 가야,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를 구원하러 온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였다.
- 403년 왜와 가야를 끌어들여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404년에는 왜, 가야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였으나 그 때마다 패했다. 왜, 가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고구려를 경격하기 위한 청병사와 비슷하였다.
405-420년(15년) | 18대 전지왕 | 전지,영,전
- 아신왕의 아들
- 아신왕의 태자 도기(전지왕)는 왜에 있다가 405년 백제로 돌아가서 왕위에 오른다.
- 405년 아신왕이 사망하자 첫째 숙부 부여훈해가 임시 섭정을 맡았으나 막내 숙부 부여설례가 부여훈행를 시해하고 후임 임시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해충이 부여설례를 몰아내어 주살한 후 백제에 도착한 전지왕이 16세에 보위에 오르자 405년부터 408년까지 해충이 섭정을 맡았고 420년까지 천정하였다.
-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두번째 칠지도를 하사했다.
-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움
- 420년3월 향년31세로 죽었고, 아들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아들 구이신왕에게 양위하고 5년을 더 살다 사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 동진을 지배하였다.
420-427년 (7년) | 19대 구이신왕 | 구이신
- 전지왕의 장남
- 즉위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만치가 섭정하였다고 한다.
- 반란중에 살해 당하였다.
427-455년 (28년) | 20대 비유왕 | 비유,비
- 구이신왕의 아들 또는 전지왕의 서자.일설에는 구이신왕의 손자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 비유는 인교 청황(412-453)는 동일인이다
- 비유왕이 왜에서 낳은 아들 가수리(개로왕)를 왜왕 자리에 앉힌다. (왜왕: 사이)
- 427-428년까지 해충이 섭정하였고 428년부터 454년까지 친정하였고 454년부터 455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경사가 대리청정을 했다.
- 433년에 신라에 사자를 보내 친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의 수호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남조, 송,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반항하는 태세로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비유왕의 사망은 반란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유왕이 죽자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때는, 신라 눌지왕은 백제를 구원하는 정예군을 파견하였다.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 사례이다.
- 비유왕과 안코 천황은 같은 사람인가? (곤지의 아버지는 비유왕이다.)
455-475년 (20년) | 21대 개로왕 | 경사,경
-비유왕의 아들
- 일본 사이왕(443-455)이 개로왕이 되다
- 왜에 있던 가수리(개로왕)는 455년 백제로 가서 개로왕이 되었고, 동생 곤지가 왜왕인 고오(22년,455-477)가 되었고 바로 유랴꾸 천황(21대,22년,457-479)이다.
- 458년 8월 송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곤지)등 11인의 문무가 뛰어나고 충성스러우며 근면함을 말하곤 3품 관직의 제수를 청했다. 이때 관직을 제수받은 11인 가운데 8인은 여씨 즉 부여씨로 백제 왕족이었다.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을 보이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 부여곤지(여곤)는 459년 왕명으로 왜로 파견된다.
- 곤지: 개로왕의 동생, 비유왕의 아들이다. 개로왕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곤지에게 주었으며, 이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곤지가 이를 데리고 일본에 도착했을때 낳은 아들이 무령왕이다.
- 458년 규슈 다마나 일대에 살던 백제 이민 땅에 백제 왕족 여기가 우현왕으로 임명되면서 이곳도 백제 다무로가 생기게 되었다.
백제세력은 가야 지방과 한반도 규슈에 널리 다무로를 거느린 강대국으로 변모했고 그 세력 아래 범 백제 문화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침공으로 백제 세력이 꺽이면서 가야나 왜에 있던 다무로는 차츰 독립 왕국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친화 관계가 유지된다.
-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자 흙을 구어 성을 쌓았다.
- 461년 곤지가 개로왕을 만나러 백제에 다시 왔다. (이미 아들5명)
- 469년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고,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목책을 쌓아 북한산성의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는등 구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펼쳤다.
- 472년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사마,장무를 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위는 거절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아예 끊어버리고 말았다.
-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권위는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국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다.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처형되었다. 고구려군이 쳐들어 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고구려군의 재증걸루,고이만년 두 장수에게 붙잡혀 아차성 아래로 끌려가 처형되었는데, 이 두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친 자였다.
- 유랴쿠천황(곤지) 5년, 백제가 멸망당하자 고니키시 및 오오키사키,고니세시무등이 모조리 적에 손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멸망한 백제를 왜왕이 다시 일으켰다고 기록.
위례 = 이와레 (땅이름)
요한 빈켈만 | 아테네파르테논| '고귀한 단순 그리고 조용한 위대' | edle Einfalt und stile Grosse
단순성이 얼마나 고귀한 감정을 일으키고, 위대한 감정은 시끄럽지 않고 은은하고 조용하게 일을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지을때,
왕궁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프랑크게리: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면서 엄숙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거 같다. 다른게 있다고 하면 아르테파르테논 신전이 있다고 할까.
이 건축은 문에서 바라보거하고 계단으로 올라와서 보는 장면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된다. 이 아이디어를 건축적 아이디어에 응용하라
일본으로 넘어가
- 오진(오진천황, 397),목협만지(소아만지,475)곤지,임성태자,아좌태자,제명공주,아직기,왕인
일본에서 넘어온
- 전지왕,비유왕,개로왕(사이),동명왕,무열왕(무),의자왕(서명)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백제로 다시 돌아온
- 침류왕, 풍왕(천무천황)
왜에 있던 백제 다무로
1. 동경지방 (사이다마 현 교다)
2. (긴키 지방의 기와지 일대)
3. (다마나 지방)
중국에 있던 다무로
1. 진평군: 남령의 쪽(3시간), 백제향 , 백제허(백제유적지)
22담로 | 5세기 중반 동성왕이 임명한 왕과 제후: 면중왕,아착왕,메로왕,메라왕,불사후,불중후,면중후 (남제서), 5년마다 교체, 해당지역을 지배함
왕인박사 약력
출생: 백제 근구수왕 (서기375~384년)때에 영암군 군서면 성기동(현재 도구림리)에서 출생
8세때 문산재에 입문
18세때 오경박사에 등용
32세때 일본국 초청으로 도일 | 논어10권과 천자문 1권 가지고 감.
업적: 일본(아스카)문화의 원조, 일본태자(토도치랑자)의 사부, 정치고문으로 논어, 전자문등을 전수, 글과 문장 학문의 스승
기술, 공예, 가용의 창시등 일본문화의 원조로 추앙
묘역: 일본 대판부 매방시(오사카 히라카타시)소재 대판부 사적 13호지정(1938년5월)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아좌태자는 창(위덕)왕의 죽은 아들이다.
웅진시대 | 475 - 538년 (63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475-477년 (2년) | 22대 문주왕 | 문주,문원,모도,도
- 개로왕의 아들 또는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의 성격은 결잔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 475년 목협만치(소아만지)가 일본으로 넘어감
- 475년 고구려가 공격하자 개로왕의 명을 받아서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수도 한성이 파괴되었다.
- 475년 음력10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 476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기뻐하여 그 탐라국 사신을 보답으로 은솔로 임명하였다. 탐라왕게게 백제의 높은 벼슬인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 477년4월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는데, 9월에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 당했다.
-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보이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켜 후에 문주왕에 2년만에 귀족인 해구에게 살해되고, 문주왕의 장남 삼근왕이 즉위한다.
- 문주왕은 남하정책을 펼치던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위례성 일대에서 전투도중 고구려군의 첩자(해구)에 속아,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
477-479년(2년) | 23대 삼근왕 | 삼근
문주왕의 아들
- 13세에 즉위한다. 그러나 해구의 섭정으로 사실상의 실권은 해구가 장악하였다.
- 478년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왕위를 찬탈하려고 대두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좌평 진남에게 군사 2000을 주어 대두성을 공격하고 덕솔 진로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해구를 추격해 죽이게 했다. 진남과 진로에 의해 해구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왕위는 불안정하였다. 그리고 공모자인 연신이 고구려로 두주하자 연신의 3족을 멸해 거리에 매달았다.
- 479년 봄,여름 가뭄이 매우 심했고 11월에 갑자기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15세 사망)
- 2년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한채 서거한다.
- 곤지왕(유랴쿠천황)이 456년12월25일 왜왕으로 즉위한다 (456년12월25일-479년9월8일) | 인교천황의 제5황자이고, 안코 천황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다 .
479-501년(22년) | 24대 동성왕 | 동모대,마모,마제
- 문주왕의 조카 또는 사촌, 좌평 곤지의 둘째아들 (왜에 있던 곤지의 영향력)
- 동성왕은 무령왕의 이복형제
- 삼근왕이 살해되자 아버지 곤지에 의해 백제로 보내져, 10세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친정을 시작한 때는 재위 8년 486년이다.
- 481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의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에는 중국 남조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485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 488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493년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삼고, 494년과 495년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웅진 천도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499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의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 봄에 동쪽에 임류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게 여겨 궁궐의 문까지 당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 501년 음력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쳥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졌고, 현장에서 바로 사망하지 않고, 부상을 입은채 웅진성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12월에 사망했다. (32세 사망)
- 백가(귀족)가 자객을 시켜 동성왕을 살해함. 사비천도를 반대하는 웅진파
- 500년 게이타이 천황(500-531년) 즉위, 곤지의 셋째 아들이다.
501-523년 (22년) | 25대 무령왕(사마) | 사마,융
곤지의 장남 | 62세 사망
- 왜왕 부(478-501) = 무령왕은 동일인다
- 일본 계체천황(남제왕) 은 곤지의 셋째아들
- 503년 아우인 게이타이 천황(계체천황)에게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보낸것이 청동거울인'인물화상경'이다.
- 513년 태자 순타가 죽었다.
- 왜 5왕: 찬(리추),진(한제이),제(인교),흥(안코),무(유랴쿠) | 이 중 무왕이 곤지왕이다. 곤지왕(재위기간: 477-502) | 오오키미
- 526년 무령왕이 죽고 3년후에 무령왕비(둘재부인,성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 22담로: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사비시대 | 538-660년 (122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523-554년 (31년) | 26대 성왕 | 명농,명,성명
- 성왕은 흠명천황과 동일인 이다
- 무령왕의 아들 |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 |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16관등제(귀족관료들의 상하 위계질서 확립), 22부제(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12부와 일반 서정을 관리하는 외관10부), 5부5항(사비도성의 도시를 5부로 나누고, 전국을 5항으로 나누었다)
- 540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전하여 왜국으로 망명하였고 왜국왕이 되었다. 540년이 킨메이 원년이 되는 것이다.
- 552년(또는 538년) 최초로 불교를 일본에 포교함. (긴메이천황: 538-571)
- 554년 전쟁중인 관산성(삼성산)으로 아들 창을 위로하러 가다가 신라의 장군 김무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함.
- 전사한 것이 아닌 일본으로 가서 (흠명천황,긴메이천황) 통치하고, 아들인 창이 위덕왕이 된다
554-598년 (44년) | 7대 위덕(창)왕 | 창
- 성왕의 장남, 30살의 나이로 즉위
- 성왕을 위한 '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됨)
- 562년 가야멸망
- 585년 비다쓰천황이 죽고, 부인인 스이코천황(39세)이 592년 즉위했다. (비다쓰(남편)-요메이(친오빠)-스슌(이복남매)-스이코)
비다쓰와 스이코는 이복남매였다. (아버지가 같음: 칸메이천황) 남매간 근친결혼
- 597년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불교와 제철기술을 갖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오우치가 임성태자의 후손이고. 1557년 멸문당하고 도요타씨로 성을 바꾸었다.
- 597년 아좌태자(의자왕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 아좌는 598년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598-599년 (1년) | 28대 혜왕 | 계
- 성왕의 차남
599-600년 (1년) | 29대 법왕 | 선,효순
- 혜왕의 아들
600-641년 (41년) | 30대 무왕 | 장,서동
- 무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를 배신하였던 신라를 12번 공격하였다.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갔다가 백제왕으로 다시 돌아와 무왕이 된다. 성왕의 셋째아들.
- 611년3월2일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일본 양마구치현에 상륙해 쇼토쿠태자에게 다타라씨라는 성씨와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 다타라씨는 오우치가 됐고 무역을 독점하면서 열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한다
- 시조 임성태자: 다타라-오우치-도요타
- 무왕이 지모밀지(지마마지는 익산의 옛이름) 로 천도하여 사찰을 짓고 경영하였다. - 관세음응험기
- 무왕의 출생지: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부여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광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서동이라 했다. - 삼국유사
무왕은 익산에서 자랐다. 익산은 무왕의 성장과정에 연결되고,
- 왕궁평성, 동서 234m, 남북으로 493m 이다.
- 630년 익산(금마저)천도계획: 왕궁과 미륵사를 만듦. (일본 서명천황이 천도를 적극 도와줌) , 서명천황 = 의자왕, 익산 -> 사비 천도는 의자왕의 의지였다. 왕궁사 5층목탑은 천도후 궁터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왕궁사 5층석탑에서 금동으로 만들어진 사리내함이 발견되었고, 그안에 녹색내함 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청동사리외함안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내함 안에서 금제금강경이 발견되었다. 19장의 금판이 2줄의 금띠에 묶여 있었는데 마치 금으로 만든 책 같았다.
금제불강경의 글자체는 정영화 되기 전의 글씨체이다. 7세기초반(무왕초기) 글씨체이다.
청동여래입상, 같은 5층석탑 기단에서 신라시대 청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미륵사 목탑 65m , 32판축기법으로 만들어졌고, 이 목탑은 무왕40년(639년)11월 벼락으로 제석사가 불에 타 유실되었다 - 관세음응험기(일본) -> 원래 금제금강경와 녹색사리병이 안치되었던 목탑이다. 제석사가 불타서 현재의 왕궁리로 옮겨 온 것이다.
제석사의 유실된 목탑의 주출돌 위에 현재 왕궁리 5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안에 청동여래입상을 봉안한 것이다.
- 수부 = 수도 (중앙정부, 왕이 머무는 지명 | 5부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 수부(왕이 머무는 곳)
- 무왕31년(630년) 2월에 사비(부여)성을 고치고, 왕이 웅진(공주)성으로 행차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에 부역을 정지하고 왕은 웅진에서 돌아왔다 - 삼국사기
사비세력과 익산세력의 정치적 대립에 사비세력이 익산세력을 물리쳤다. 의자왕은 무왕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는데, 어버이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 삼국사기
- 무왕은 익산에 묻혔다.
- 무왕의 딸 제명공주(사이메이천황), 시집을 갖다가 아들을 하나 나앟고, 남편은 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리고 의자왕과 결혼을 한다.
641-660년 (19년) | 31대 의자왕 | 의자
무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 641년 40세에 의자왕에 등극한다.
아내: 제명공주(제명천황,소이메이천황)와 결혼, 제명공주는 무왕의 딸
- 의자왕은 서명천황(조메이) 이다.
- 641년 조메이 천황(629-641) 사망, 의자왕과 조메이는 동일인 가능성 높음.
- 642년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검일의 아내(고타소,김춘추의 딸)를 빼았고,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백제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품석과 김춘추의 딸의 목을 베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것을 맹세했다.
- 의자왕 제위기간 20년동안 신라를 10번 공격하여 전쟁 하였다.
- 645년6월12일 소아입록(소아씨) , 판개궁에서 중대형과 중신겸족에 의해 살해당함 (대화개신)
중대형은 천지천황이 된다. 663년 백제에 파병을 보낸 천황이다. 의자왕의 아들 풍과 함께 신라와 싸운 영웅이었던 것.
신라에 배신감과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친당정책을 했던 소아씨를 살해한 것이다. 일본에게는 나라를 세웠지만 백제에게는 또 다른 배신자였던 것.
백제는 일라를 덕이에게 시켜 살해했다. 일라는 왜의 사신(40년간)으로 백제가 왜에 나라를 세우는 계획을 방해했다.
- 의자왕이 중신겸족(내대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에게 바둑판을 보냈다. 일본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 660년6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명, 신라 김유신의 5만에 의해 멸망됨
소정방이 정림사 5층석탑에 쓴글: 대당평백제국비명 | 백제는 250현에 24만호수를 가졌으며 인구는 620만이다
- 웅진성, 예식장군(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였다. 예식은 당나라 종3품 금위군 대장군이 되었다.
- 흑치상지는 당나라로가 장군이 되어 30년간 불패의 장군으로, 종3품 대장군이 되었다.
- 의자왕의 증손녀, 융의 손녀가 당나라의 왕비(괵왕(이옹)의 부인)가 되었다. 부여태비 690 (의자왕-부여융-부여덕장-부여태비)
661-663년 (2년) | 32대 풍왕 | 풍, 풍장
의자왕의 아들
- 풍은 왜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661년 백제로 돌아와 왕(풍왕)이 되었다.
- 661년 소이메이천황(여왕)이 죽고 중대형이 천지천황이 되었다. 천지천황은 상복을 입은체 전쟁을 계속준비한다. 7년후 왕위계승.
- 661년 신라 김춘추(무열왕)가 죽었다.
- 661년9월 부여풍은 왜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왔다. (5000명의 군사를 동반)
- 662년3월 부여풍이 '백제 왕'으로 인정받고, 5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한다. | 풍왕
- 632년 익산으로 천도 좌절
- 663년8월27일 당 수군 170척과 이호하라노 기미오미가 이끄는 1만여명의 왜군이 1차 전투를 벌였다. 왜군이 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28일 다시 왜의 본군과 당 수군 사이에 2차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4차례 접전 끝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패배하였다.
백제 ,왜 연합군은 나당 수군의 화공과 협공에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고, 400척이 불타버렸다. 풍왕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마침내 9월7일 왕자 부여충승등이 왜군과 함께 항복하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 663년8월 백강구전투 패전으로 백제부강 실패 | 백제와 왜국 vs 신라와 당나라 연합 아버지의 나라 백제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파병이었다.
- 부여풍장이 천무천황이 되었다.
- 천지천황(중대형)은 667년 교토로 천도하고,668년1월7 천황 즉위식을 하고, 670년 왜 -> 일본 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671년 천지천황이 죽고, 673년2월27일 천무천황이 즉위한다. 그는 국호를 일본으로 확정하고 군주의 명칭인 대왕을 천황으로 바꿨다. 686년9월9일 천무천황은 병으로 죽었다.
663년 ~
- 680년 백제의 흑치상지가 토번을 물리쳤다.
- 사타충의, 당나라 궁성을 지키는 호위장군
- 8세기 난원경, 절충도위가 되었다.
- 당나라 수도 장안성 호위, 순장군
- 백제 왕족이 이전받았다. 백제인의 직위가 올라갈 수록 백제 왕족의 지위가 올라갔다. 건안고성에서 백제가 다시 일어났다.
- 당황제가 바뀌자 이옹(당황제증손자)이 숭국부인을 죽이고, 왕위를 물러난뒤 백제의 왕족 부여태비(22)와 결혼해 괵왕에 복귀하게 된다. 부여태비는 49에 죽고, 맏아들 이거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 건안고성을 부여융이 대방군왕으로 다스렸고, 건안고성이 사라졌을때(당은 발해에 멸망) 백제의 씨가 사라졌다.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정릉사지 5층석탑:
탑의 비례: 1+5,2+4,3*2배 = 모두같음
1인치 기준: 고구려,백제 = 35 신라,당 = 29.8
석탑은 정북을 향해 만들어 졌는데, 진북방향에서 2.5도 서쪽으로 틀어져 있다( 357도32분). 북쪽을 정확히 찾을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별연구)
- 소정방: 대당평백 제국비명
궁남지 31자 목간 | 서부후항(주소를 뜻함) => 5부5방 | 동부,서부,중부,남부,북부,중부 | 동항,서항,중항,남항,북항 (상항,전항,중항,하항,후항)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죽은아들은 아좌태자 이다.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백제부흥운동 | 661-663년 (3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523-554년 (31년) | 26대 성왕 | 명농,명,성명
- 성왕은 흠명천황과 동일인 이다
- 무령왕의 아들 |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 |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16관등제(귀족관료들의 상하 위계질서 확립), 22부제(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12부와 일반 서정을 관리하는 외관10부), 5부5항(사비도성의 도시를 5부로 나누고, 전국을 5항으로 나누었다)
- 540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전하여 왜국으로 망명하였고 왜국왕이 되었다. 540년이 킨메이 원년이 되는 것이다.
- 552년(또는 538년) 최초로 불교를 일본에 포교함. (긴메이천황: 538-571)
- 554년 전쟁중인 관산성(삼성산)으로 아들 창을 위로하러 가다가 신라의 장군 김무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함.
- 전사한 것이 아닌 일본으로 가서 (흠명천황,긴메이천황) 통치하고, 아들인 창이 위덕왕이 된다
554-598년 (44년) | 7대 위덕(창)왕 | 창
- 성왕의 장남, 30살의 나이로 즉위
- 성왕을 위한 '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됨)
- 562년 가야멸망
- 585년 비다쓰천황이 죽고, 부인인 스이코천황(39세)이 592년 즉위했다. (비다쓰(남편)-요메이(친오빠)-스슌(이복남매)-스이코)
비다쓰와 스이코는 이복남매였다. (아버지가 같음: 칸메이천황) 남매간 근친결혼
- 597년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불교와 제철기술을 갖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오우치가 임성태자의 후손이고. 1557년 멸문당하고 도요타씨로 성을 바꾸었다.
- 597년 아좌태자(의자왕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 아좌는 598년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598-599년 (1년) | 28대 혜왕 | 계
- 성왕의 차남
599-600년 (1년) | 29대 법왕 | 선,효순
- 혜왕의 아들
600-641년 (41년) | 30대 무왕 | 장,서동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갔다가 백제왕으로 다시돌아와 무왕이 된다. 성왕의 셋째아들.
- 611년3월2일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일본 양마구치현에 상륙해 쇼토쿠태자에게 다타라씨라는 성씨와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 다타라씨는 오우치가 됐고 무역을 독점하면서 열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한다
- 시조 임성태자: 다타라-오우치-도요타
- 630년 익산(금마저)천도계획: 왕궁과 미륵사를 만듦. (일본 서명천황이 천도를 적극 도와줌)
- 무왕의 딸 제명공주(사이메이천황), 시집을 갖다가 아들을 하나 나앟고, 남편은 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리고 의자왕과 결혼을 한다.
641-660년 (19년) | 31대 의자왕 | 의자
무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 641년 40세에 의자왕에 등극한다.
아내: 제명공주(제명천황,소이메이천황)와 결혼, 제명공주는 무왕의 딸
- 의자왕은 서명천황(조메이) 이다.
- 641년 조메이 천황(629-641) 사망, 의자왕과 조메이는 동일인 가능성 높음.
- 642년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검일의 아내(고타소,김춘추의 딸)를 빼았고,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백제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품석과 김춘추의 딸의 목을 베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것을 맹세했다.
- 645년6월12일 소아입록(소아씨) , 판개궁에서 중대형과 중신겸족에 의해 살해당함 (대화개신)
중대형은 천지천황이 된다. 663년 백제에 파병을 보낸 천황이다. 의자왕의 아들 풍과 함께 신라와 싸운 영웅이었던 것.
신라에 배신감과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친당정책을 했던 소아씨를 살해한 것이다. 일본에게는 나라를 세웠지만 백제에게는 또 다른 배신자였던 것.
백제는 일라를 덕이에게 시켜 살해했다. 일라는 왜의 사신(40년간)으로 백제가 왜에 나라를 세우는 계획을 방해했다.
- 의자왕이 중신겸족(내대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에게 바둑판을 보냈다. 일본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 660년6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명, 신라 김유신의 5만에 의해 멸망됨
- 웅진성, 예식장군(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였다. 예식은 당나라 종3품 금위군 대장군이 되었다.
- 흑치상지는 당나라로가 장군이 되어 30년간 불패의 장군으로, 종3품 대장군이 되었다.
- 의자왕의 증손녀, 융의 손녀가 당나라의 왕비(괵왕(이옹)의 부인)가 되었다. 부여태비 690 (의자왕-부여융-부여덕장-부여태비)
661-663년 (2년) | 32대 풍왕 | 풍, 풍장
의자왕의 아들
- 풍은 왜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661년 백제로 돌아와 왕(풍왕)이 되었다.
- 661년 소이메이천황(여왕)이 죽고 중대형이 천지천황이 되었다. 천지천황은 상복을 입은체 전쟁을 계속준비한다. 7년후 왕위계승.
- 661년 신라 김춘추(무열왕)가 죽었다.
- 661년9월 부여풍은 왜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왔다. (5000명의 군사를 동반)
- 662년3월 부여풍이 '백제 왕'으로 인정받고, 5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한다. | 풍왕
- 632년 익산으로 천도 좌절
- 663년8월27일 당 수군 170척과 이호하라노 기미오미가 이끄는 1만여명의 왜군이 1차 전투를 벌였다. 왜군이 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28일 다시 왜의 본군과 당 수군 사이에 2차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4차례 접전 끝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패배하였다.
백제 ,왜 연합군은 나당 수군의 화공과 협공에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고, 400척이 불타버렸다. 풍왕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마침내 9월7일 왕자 부여충승등이 왜군과 함께 항복하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 663년8월 백강구전투 패전으로 백제부강 실패 | 백제와 왜국 vs 신라와 당나라 연합 아버지의 나라 백제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파병이었다.
- 부여풍장이 천무천황이 되었다.
- 천지천황(중대형)은 667년 교토로 천도하고,668년1월7 천황 즉위식을 하고, 670년 왜 -> 일본 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671년 천지천황이 죽고, 673년2월27일 천무천황이 즉위한다. 그는 국호를 일본으로 확정하고 군주의 명칭인 대왕을 천황으로 바꿨다. 686년9월9일 천무천황은 병으로 죽었다.
663년 ~
- 680년 백제의 흑치상지가 토번을 물리쳤다.
- 사타충의, 당나라 궁성을 지키는 호위장군
- 8세기 난원경, 절충도위가 되었다.
- 당나라 수도 장안성 호위, 순장군
- 백제 왕족이 이전받았다. 백제인의 직위가 올라갈 수록 백제 왕족의 지위가 올라갔다. 건안고성에서 백제가 다시 일어났다.
- 당황제가 바뀌자 이옹(당황제증손자)이 숭국부인을 죽이고, 왕위를 물러난뒤 백제의 왕족 부여태비(22)와 결혼해 괵왕에 복귀하게 된다. 부여태비는 49에 죽고, 맏아들 이거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 건안고성을 부여융이 대방군왕으로 다스렸고, 건안고성이 사라졌을때(당은 발해에 멸망) 백제의 씨가 사라졌다.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642년 백제왕자 교기 및 동모매 여자 4인, 40여 사람이 왜로 갔다.
일본에 있던 여용이 백제로 간 여풍을 도왔다. | 663년 백촌강 전투, 병사 27000명 보냄
지면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건물 전체가 지면에서 높이 들어올려져 지어졌다. 이렇게 건물을 땅에서 들여 올리는 양식을 고상식 이라고 부르며,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까지 흔한 형태였다. 긴 건물이기 때문에 북창,중창,남창으로 분류한다.
정창언은 729-749년 사이 창건되었다.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45대 쇼무천황의 유품: 숟가락,칼,거울,무기,목칠공예품,악기등 애장품 600여종과 황실의 보물을 보관한다
1년에 한번 가을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선발적으로 볼 수잇다.
한반도 삼국시대의 유물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으며, 신라 민정문서, 신라에서 일본으로 수입한 물품 리스트, 통일신라의 악기인 신라금, 비파,유리그릇,유리접시,양탄자,숟가락(천년동안 포장그대로 보관),인삼,먹등 있고, 면류관과 관련 의복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