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릿츠는 독일브레멘에서 태어났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 다녔고, 1894년, 오토 모더존의 설득을 받아 워프스웨드의 예술가촌에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그곳에서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다.
1897년, 화가지망생 헤르미네 로테와 결혼했다. 1905년, 헤르미네가 결핵 진단을 받은 후, 그와 그의 가족은 베게삭으로 이사했고, 나중에 Deutscher Künstlerbund의 회원이 되었다.
프릿츠는 1909년에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하여 브레멘의 왈러 프리드호프에 묻혔다. 부인헤르미네는 병에서 회복되자 그의 작품을 홍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후 1990년, 그의 손녀 게르트루드는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홍보하기 위해 "프리츠와 헤르민 오버벡 재단"을 설립했다.
다니엘 가버는 미국의 인상파 화가로 펜실베니아 인상주의로 알려져 있는 펜실베니아 풍경화 학파의 선두주자입니다. 그는 미국 인디아나주 노스맨체스터에서 태어나, 1897년에 신시내티 예술 아카데미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펜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도 공부했으며, 미술을 함께 공부하던 메리 프랭클린과 결혼하였습니다. 결혼 후 다니엘 가버와 메리 프랭클린은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유럽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그림은파스텔 톤의 광선과 밝은 색감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이후 1970년에 이들 부부는 다시 미국 펜실베니아로 돌아왔고, 다니엘 가버는 청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낭만적인 풍경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첨부된 첫 번째와 두번째 그림은 그의 첫째 딸 Tanis를 그린 그림입니다. 아버지가 그림을 그려준다고 하자 하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 입고 서 있는 딸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두 번째 그림인 창가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도 딸 Tanis입니다.
다니엘은 1906년에 큰 딸 Tanis를 1910년에는 아들 John을 낳았고, 자신의 가족의 모습들도 화폭에 종종 담았지만 아들보다는 딸을 더 많이 그렸습니다. 역시 딸 사랑은 아버지가 맞나 봅니다. ^^;
다니엘은 1958년에 자신의 스튜디오에 있는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드가'는 발레리나를 특히 많이 그렸습니다.
감성적인 스케치와 감각적인 색채가 뛰어나 많은 찬사를 받고 있지요.
하지만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들의 이면에는, 당시 발레계의 저속한 책략과 어린 소녀들이 받았던 고통과 학대가 있었습니다.
고아나 가난한 아이들이 예술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발레를 했고, 이들을 만나기 위해 검은 양복을 입고 백스테이지를 찾아오는 음흉한 신사들이 드가의 그림 일부분에 숨어있답니다.
영국의 '그웬 존'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댕의 숨겨진 여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생전엔 주목받지 못한 화가입니다.
그녀는 20대 후반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으나 돈을 벌어야했기에 모델 일을 시작하죠.
모델로서 로댕을 만났지만 이내 애인이 됩니다. 당시 로댕의 나이는 63세.
하지만 우유부단한 로댕과는 아무런 비전이 없다는걸 깨닫고 조용히 떠납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수많은 편지를 써놓고도 보내지 않았죠.
화가로서는 누구보다 당당했고 자신감도 있었지만, 로댕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은둔의 길을 선택하죠.
30대 중반, 파리 근처 시골마을로 가서 고양이와 함께 평생을 살았답니다.
로댕에 의해 잊혀진 두 예술가 - 까미유 클로델은 정신병원으로, 그웬은 스스로 쌓은 성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네요. ㅠ
그녀의 그림에서 고독과 슬픔이 묻어나는 이유는 그렇습니다..
'카스퍼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입니다.
발틱 해안에 인접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북부 독일의 거친 자연과 절벽이 있는 인근 뤼겐섬을 보고 자랐습니다.
북유럽 바다에서 달이 뜨고, 해가 뜨는 극적인 장면을 강렬하면서도 시적으로 연출하였죠.
자연은 크고 넓게, 인간은 작게 그리면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담았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을 살롱전에 출품한 ‘마네’는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이 작품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올랭피아"로 또다시 물의를 일으키죠.
'고야'에게서 영감을 얻어 '마네'가 그린 작품은, 한국전쟁 때 '피카소'에게까지 작품의 의미가 이어졌습니다.
몽마르트 근처의 “카페에서” 작품은, 그리다가 맘에 안들었는지 멀쩡한 그림을 칼로 잘라 두 작품으로 나누어 그리기도 했답니다.
언젠가 ‘드가’가 마네 부부를 그려왔는데, 피아노 치는 아내 부분이 맘에 안든다고 그것도 일부분을 찢어버리기도 했죠.
마네의 마지막 작품,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1869년 개업하여 아직도 영업중인 극장식 주점입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외젠 블라스'는 주로 아름다운 베니스 여인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들이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연애 이야기를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특유의 따뜻하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림 속 여성들의 의상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당시 복식의 역사적 사료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테일하네요.
네덜란드 태생의 '키스 반 동겐'은 감각적인 여성 초상화로 명성을 얻은, 야수파 화가입니다.
파리에서 지내던 중, 아내가 딸을 데리고 네덜란드 본가에 간 사이 1차대전이 일어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 못해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죠.
혼자 파리를 지키며 몽마르트의 무희를 그리던 반 동겐에게 갑자기 사랑이 다가옵니다.
파리 패션계의 거물, 마담 자스미.
그는 '반 동겐'을 파리 사교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초상화가로 만들어주죠.
전쟁이 끝난 후, 아내와는 헤어졌지만 파리 패션계 거물과도 오래가진 못했답니다.
그의 작품에는 야수파다운 화려한 원색과 자유분방한 표현이 가득차있지만 어딘지 긴장과 불안감도 담겨있네요.
사교계 VIP들을 가장 화려하게 그린 초상화가 '키스 반 동겐'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봄의 교향악, 꽃의 교향곡,숲의 교향악이 들리는 듯 하다.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풍경화가 중 한 명. 자연에서 배우는 전염성 있는 기쁨을 그린다.
어린 나이에 자연을 사랑하는 열정을 키웠고 땅에서 일하는 조부모로부터 시골의 많은 것을 배웠다. 나고 자란 시골의 새, 나비, 식물등 모든 것을 배우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Paul은 평생을 예술에 쏟아부었다.1972년 예술에 입문한 후 수채화, 잉크 및 아크릴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로 작업한다. 시간, 계절 및 빛의 감각을 포착하여 일년 내내 좋아하는 장소를 탐색한다. .수년 동안 그는 호스피스, 야생 동물 자선 단체 및 교회 기금 마련 프로젝트를 포함한 많은 일을 항상 열성적으로 지원했다.여러 대형 출판사에서 500개 이상의 그가 만든 이미지가 연하장, 달력 및 한정판 인쇄물에 사용되었다
1896년 오늘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라, '신문의 날'로 정해졌답니다.
화가들도 신문을 소재로 많은 작품들을 창작했는데, 세잔은 신문 읽는 아버지를, 르누아르는 신문 읽는 모네를 그렸죠.
고흐는 공원 입구에서 신문 읽는 사람을 그렸고, 드가는 드가답게 신문 읽는 무용수를, 샤갈은 신문 장수를 그렸답니다.
피카소와 데이비드 호크니는 신문을 이용한 꼴라쥬 작품을, 달리는 "Dali News"라는 신문을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죠.
2021년, 미국의 한 아티스트는 눈보라와 코로나로 세상이 고립되자 지역신문의 헤드라인들을 모아 예술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원로화가 김영재는 젊은 시절에 무거운 톤의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나이 오십 넘어 기하학적인 구도의 강변 풍경을 그리다가, "청산 靑山"을 만났습니다.
알프스의 경이로움에 감동을 받은 이후로, 히말라야와 하롱베이, 노르웨이 피요르드, 지리산, 설악산 등 명산의 장엄한 풍경을 '인디고 블루'의 미감으로 표현했습니다.
겹겹이 쌓인 산자락의 푸른 색은 공기의 빛깔이며, 우주의 색채라 느껴지네요.
그림 속에 찍혀진 수많은 점들은, 바위와 나무, 새와 벌레, 꽃과 풀 등 산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호주의 블루마운틴을 그리는 대표적 풍경화가. 빛이 투과되는 것과 같은 맑은 채색의 수채화로 사랑을 받았다.독학으로 육지와 바다 경치를 그려서 , 관광객들의 버스에 그림을 팔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유명한 호주 예술가 Clifton Pugh의 집에서 Artist In Residence로 살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2003년 그는 4년 동안 살았던 중국을 여행했고 수묵화 기법을 보여준 몇몇 위대한 중국 예술가들을 만났다.25년 동안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영국 태생의 미국 화가이자 허드슨리버화파 미술운동의 창시자입니다.
콜은 미국 최초의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다.
낭만적인 풍경화와 역사화를 그렸다.
그는 유럽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미국적인 감성을 더 잘 표현해 내었고, 활동 기간 내내 다작을 했으며 주로 캔버스에 유화 작업을 했습니다.
콜의 그림은 전형적으로 우화적이며,
종종 분위기 있고 감동을 주는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작은 인물이나 구조물을 그렸다.
그는 현실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가 자랐던 산업 혁명 시대의 스모그가 가득한 도시 풍경과는 대조되는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이상향으로 지향합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보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산업주의, 도시주의, 서부 확장 등의 현대적 경향을 비판합니다.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태어난 화가 박수근은, 한국전쟁 때 미8군PX (현 신세계백화점) 매점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경리 일을 보며 주문받던 서울대 학생 박완서(1931~2011)는 '간판쟁이 박씨'를 몹시도 구박했답니다.
어느날 박수근이 자신의 화집을 가져와 "절구질 하는 여인의 그림"을 보여주자, 그 이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박완서는 첫소설 "나목(裸木 1970년)"을 씁니다.
초상화 가게에서 일하는 화가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박수근의 대표작 "나무와 여인"이 나오기도 하죠.
거칠고 투박하여 '화강암 질감'이라 일컬어지는, 박수근 화백의 예술에는 '서민들의 어진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무던한 서민들이 그의 작품 속 주인공입니다.
'남미의 피카소’라 불리는 콜롬비아의 '보테로'가 추구하는 화두는 '풍만함'입니다.
‘보테리즘(Boterismo)’라 이름 붙여진 '팽창된 볼륨감'이 특징입니다.
르네상스 예술을 공부하러 이태리로 갔다가 그 풍만함의 매력에 빠졌죠.
50년 넘게 뚱뚱한 인물과 동물을 그렸으며, 심지어 꽃병같은 정물까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하길 “뚱뚱한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다. 다만 볼륨을 예찬할 뿐"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질베르 르그랑'은, 재활용의 마술사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물건들에 재치있는 그림을 그려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작가의 독특한 해석으로 생활용품이 위트있는 작품으로 변신하죠.
슈퍼맨으로 변신한 경첩, 서로 키스하는 가위, . . ㅎ
놀랍고 재미있는 상상력입니다.
이탈리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는, 스무살 무렵에 파리로 와서 모델 일을 시작했습니다.
마네의 그림 속에서 "이탈리아 여인"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고흐와 코로, 드가, 르누아르 등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되었답니다.
그녀는 한때 열두살 아래 띠동갑 연하인 고흐의 연인이기도 했죠.
'탬버린'이란 이름의 카페 (Café du Tambourin)도 직접 운영했는데, 파리 예술가들의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고흐도 집 근처의 이 카페에서 식사비 대신 정물화 그림을 주기도 했으며, 그 그림은 카페 벽에 걸렸답니다.
고흐의 작품전시회도 여기서 열린 적이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카페 이름에 맞추어, 탬버린 악기에다 그녀 가족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북유럽 '스카겐 화가그룹 Skagen Painters' 중의 한 명인, 노르웨이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자연주의 화가이자, '뭉크'의 스승입니다.
그의 그림들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정지시켜 보여주는 듯, 그 뒤에 있을법한 풍부한 서사를 담고 있네요.
바닷마을 스카겐의 특징을 담은 주변의 인물들을 많이 그렸는데, 어부들의 거친 삶과 고된 노동에 지친 이웃들을 자주 등장시켰답니다.
아기는 요람에서 평화롭게 잠들었지만 하루 일과에 지친 어부의 아내는 잠이 들고 말았군요.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 '오다 크로그' 역시 화가였습니다.
앙리 마르탱(Henri Martin, 1860-1943)
앙리 마르탱(Henri Martin, 1860-1943)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주로 점묘법과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였지만, 이후 신인상주의(점묘법)와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결합한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인상주의의 밝고 화사한 색감과 점묘법의 세밀한 표현을 혼합하여 따뜻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풍경화, 신화적 주제, 시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 프랑스 남부의 자연경관을 따뜻한 색조와 빛의 효과를 강조하여 표현했습니다.
그의 화풍은 신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빛과 색채를 활용한 몽환적인 분위기로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