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례 = 이와레 (땅이름)
요한 빈켈만 | 아테네파르테논| '고귀한 단순 그리고 조용한 위대' | edle Einfalt und stile Grosse
단순성이 얼마나 고귀한 감정을 일으키고, 위대한 감정은 시끄럽지 않고 은은하고 조용하게 일을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지을때,
왕궁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프랑크게리: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면서 엄숙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거 같다. 다른게 있다고 하면 아르테파르테논 신전이 있다고 할까.
이 건축은 문에서 바라보거하고 계단으로 올라와서 보는 장면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된다. 이 아이디어를 건축적 아이디어에 응용하라
일본으로 넘어가
- 오진(오진천황, 397),목협만지(소아만지,475)곤지,임성태자,아좌태자,제명공주,아직기,왕인
일본에서 넘어온
- 전지왕,비유왕,개로왕(사이),동명왕,무열왕(무),의자왕(서명)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백제로 다시 돌아온
- 침류왕, 풍왕(천무천황)
왜에 있던 백제 다무로
1. 동경지방 (사이다마 현 교다)
2. (긴키 지방의 기와지 일대)
3. (다마나 지방)
중국에 있던 다무로
1. 진평군: 남령의 쪽(3시간), 백제향 , 백제허(백제유적지)
22담로 | 5세기 중반 동성왕이 임명한 왕과 제후: 면중왕,아착왕,메로왕,메라왕,불사후,불중후,면중후 (남제서), 5년마다 교체, 해당지역을 지배함
한성시대 | BC18년 - 475년 (493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BC18- 28년2월 (46년) | 1대 온조왕 | 온조
- 제1대 백제국왕 (십제->백제)
- 주몽과 소서노의 둘째아들
- 9년, 마한멸망
28.2-77년 (49년) | 2대 다루왕 | 다루
- 온조왕의 아들
77년-128년 (51년) | 3대 기루왕 | 기루
- 다루왕의 아들
128년10월 - 166년 (38년) | 4대 개루왕 | 개루
- 기루왕의 아들
166년 - 214년 (48년) | 5대 초고왕 | 초고
- 개루왕의 장남
- 초고대왕 이래 160년부터 의자대왕의 660년까지 500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160년 초고왕자는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 이즈모에 건너가서 수진국의 왜여왕인 세오녀 히미코여왕을 사로잡아 일본 열도를 차지했다. 일본 히미코 즉 세오녀(가야인 연오랑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팔중성에 가두고 8명(아들5,딸3)의 자손을 낳았다. 이중 세오녀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메노오시호미이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구주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알알이이며, 알알이가 구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의 증조부가 스사노오(초고왕) 이다.
초고왕자는 다시 백제로 돌아와 초고왕이 되었다.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속고왕 또는 속고대왕이다. '신찬성씨록'에 유일하게 속고왕만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초고왕의 일본첫째왕자는 아메노오시호미(161년생), 일본둘째왕자는 첫째 신녀인 모치코가 낳은 아메노호히 와자로서 시마네현 귀족의 선조가 되었다.
셋째왕자는 아키코.하야아키쯔신녀가 낳은 아마쯔히꼬네로서 후쿠오카의 자성국조등의 선조가 되었다. 넷째 왕자는 미치코.오오미야가 낳은 이꾸쯔히꼬네이고 다섯째 왕자는 아야코 토요히메가 낳은 쿠마노쿠스비 이었다. 5왕자의 순서는 신녀의 순서다.
-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주몽검)를 규슈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주몽을 일본에서 쯔모왕이라고 했다. 초고대왕은 일본에 고주몽신사를 세워 고주몽 제사를 지내도록 주몽왕검을 보내준 것이며, 이는 히미코에게 왜국 왕권을 수여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주몽왕검은 일본의 삼보중에 첫째였다. 이 주몽왕검의 형식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우가미신은 백제계1대 대마도주 불합존이다. 동시에 단군시대 대마도주 언파불합이후로 51세 대마도주였으며, 그의 다른 이름은 야마토오 즉 왜남왕이다. (불합은 대마도를 의미한다) 1대 대마도주불합왕는 구수대왕인 대국주신의 권유로 대마도의 대산진신의 딸 타마요리히메를 이즈모로 초청하여 결혼하였고 이쯔세(184-238)를 낳았다.
대마도는 한개의 섬 이름이면서 실상은 두개의 섬이다. 파도 때문에 섬의 중간에서 아주 조금 합치지 못한 두개의 섬이지만 실상은 하나라는 뜻이 불합이다. (불합왕 = 대마도왕)
- 니니기(174-220)는 최초로 일본 천황이 된 신무천황(194-256)을 낳았다.
니니기는 구주에 와서 구수대왕의 후비였던 대마도의 해신 즉 오미미신의 딸 고노하나사쿠야히메와 결혼하여 칠삭동이 신무천황을 낳았다. 샤쿠야히메는 구수대왕의 세아들을 낳았었고, 네번째 아들이 니니기의 아들인 신무천황이다.
214-234년 (20년) | 6대 구수왕 | 구수
- 초고왕의 아들
- 구수왕은 초고왕의 딸인 수시리 공주와 결혼하여 일본의 대화에 진출하여 대국성에 살며 일본의 대국주신이 되었고 214년에 다시 백제로 돌아와 백제왕이 되었다.
구수대왕은 일본에서 귀수왕이다.
구수왕자는 초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를 정비로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나모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다스리는 오호쿠니누시가 되었다.
- 대국주신의 대국성은 오사카 대국정에 있었다.
234년 (1년) | 7대 사반왕 | 사반
- 구수왕의 장남
- 재위한 지 1년만에 폐위되었다.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이왕에 의해 폐위당함)
- 사반왕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효소천황이자 사대주신이 되었고 사반대왕의 딸은 신무천황의 비가 되었다.
신무천황도 초고대왕의 증손자이고, 신무천황비도 초고대왕의 증손녀다.
234-286년1월 (52년) 8대 고이왕 | 고이,구이,고모,구태
- 개루왕의 차남
- 활을 잘쏘고 무예가 뛰어났다.
- 풍납토성 축조
286-298년(12년) | 9대 책계왕 | 책계
- 고이왕의 장남
- 체격이 크고 사나웠다.
- 286년 위례성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대비해 사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
- 298년 한군이 낙랑과 맥인을 이끌고 침입했고, 백제가 패했고 책계왕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298-304(6년) | 10대 분서왕 | 분서
- 외모가 준수하여 왕위에 올랐다. 한군과의 전투에서 백제가 패하여 부왕이 사망하자, 어려서부터 왕위를 계승하였다.
- 한군에 강경책을 폈고 304년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경했을때 낙랑군 정예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304-344년(40년) |11대 비류왕 | 비류
- 구수왕의 차남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초고왕계가 왕위를 다시 가져온 것. -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 계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하여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 활을 잘 쏘았고 성품이 너그러웠다.
344-346년 (2년) | 12대 계왕 | 계
- 분서왕의 아들
- 계왕이 사망한 이후 고이왕통이 끊겼다
346-375년 (29년) | 13대 근초고왕 | 초고,구
-비류왕의 차남 | 석촌동 3호분
-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 364년 가야의 부족국인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해 야마토 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 366년3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368년 신라를 존경하여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 두필을 신라에 선물하였다.
- 남으로는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54개 부족국가)을 통일하였다.
- 369년3월 왜는 아라다노와케,가고노와케를 장군으로 감고 가야 탁순국에 건너가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훼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 왜는 군사를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가서 남만의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치 주장: 왜가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했다고 주장)이에 그왕인 초고와 왕자 구수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 369년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군, 구모로성)에 쳐들어오자, 태자 근구수를 보내 크게 무찌르고 5천명의 고구려군을 사로 잡았다.
- 371년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패수(예강성)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대방 지역을 점령하였고, 여세를 몰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름:쇠)을 전사시켰다.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꽃아 효수하였다.
- 372년에 근초고왕이 왜에 손자 침류를 왜왕으로 보내면서 그 상징으로 하사한 칼이 '칠지도'이다. | (칠지도와 칠자경)
현존하는 칠지도는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로 두번째 칠지도이다.
- 진나라때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였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귄의 땅을 점거해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주서백제전에 의하면, 백제는 동북으로 신라에,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 근초고왕의 즉위부터 20년(365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 때에 20년간 근초고왕은 무슨일을 했는가?
375-384년 (9년) | 14대 근구수왕 | 구수,수
- 근초고왕의 아들
- 369년 태자 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 정벌을 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 369년 고구려를 크게 무찌르고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려 했으나 장군 막고해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 라고 조언하자 그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다시 침입하자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 시켰다.
- 376년11월 고구려 소수림왕이 백제 변경을 공격했다. 근구수왕은 377년10월 3만명의 병사로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이상기후가 겹치면서 제1차 여제전쟁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대패 하였다.
- 379년4월 하루종일 흑이 비처럼 내렸다. 380년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5월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장이 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382년 봄에 가뭄이 들어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결국 국가창고의 곡식을 푸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384-385년11월 (2년) | 15대 침류왕 | 침류
- 근구수왕의 장남
- 384년에 왜왕 침류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다.
- 384년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7월에 동진에 조공하였다. 9월 동진에서 호승 마라난타가 들어왔고 이를 계기로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다.
385-392년 (7년) | 16대 진사왕 | 진사
- 근구소왕의 차남
- 385년 아신왕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 386년 고구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을 쌓게 했다.
- 389년과 390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달솔 진가모가 도압성을 함락 시켰다.
- 391년 7월 광개토대왕이 군사 4만명을 이끌고 북쪽 변경의 석현성등 10여성을 함락시켰으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군사작전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맞서 싸우지 못했다. 10월에는 험준한 요새지인 관미성도 함락 당했다.
- 390년 오진을 고마확고로 책봉한다 . 오진천황의 이름은 호무다 와께(본명:진예)이다. | 와께는 백제가 후황에 붙이던 호칭 내지 벼슬이다. 호무다는 지명이름 (고마->호무), 고마는 공주의 옛이름이다.
오진은 진씨이고 공주(고마)지역의 권력가. 왕족다음으로 권세가 막강한 진씨네 영토였다. 백제 왕족 여씨의 외척으로서 대대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후왕이었다. 후왕인 호무다 와께는 396년 광개토대왕이 고마에 있던 가바라(옛 공주) 성을 칠때 왜로 떠났다.
-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수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58개성을 공취하고 풍납토성을 포위했다. 백제는 출병해 맞서 싸웠으나 대패 하였다.
아신왕은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굻고 남녀포로1000명과 가는배 1000척을 주고, 광개토대왕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신하가 되겠소' 라고 하고, 고구려의 신하국이 되기로 맹세한다.(비문)
광개토 대왕은 백제왕을 죽이지 않고 조공만 받고 용서한다. 항복 시켜서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복의 왕.
- 397년 오진은 왜(대왜)에 나라를 세웠다. 443년즈음 진씨를 여씨로 성을 바꿨다.
- 오진천황 321-430 (재위기간 397-430) | 일본 최초의 천황
- 오친천황의 아들 인덕천황(닌토쿠천황)이 다이센릉의 주인이다.
하지만 다이센릉의 실제 주인은 유랴쿠천황(곤지)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업적)
(오진천황-인덕천황-리추천황-한제이천황-인교천황-안코천황-유랴쿠천황)
- 오진3년(399) 신하(키노쯔네수쿠네등)를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왕으로 세웠다. [일본서기]
그 동기는 391년 고구려 침공때 진사왕은 나라를 살피지 않고 사냥만 했기 때문이다.
392-405년 (13년) | 17대 아신왕 | 아신,아방,아화,아미
- 침류왕의 장남
- 393년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름 맡겼다. 진무는 1만의 병력으로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무너뜨리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394년, 395년 수곡성과 패서성에서 싸웠으나 번번이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ㅆ아현성을 쌓는등 전시 체계를 유지하였다. 398년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천문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중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징발하여 계속되는 군역으로 백성들이 주변 국가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감소하였다.
- 396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어려운 고비를 맞고 백제 세력은 왜로 뻗게 되었다. 그곳으로 명명한 확고한 집안 곧 호무다 와께의 집안과 고 확고 집안이 차지한 땅에 백제 다무로가 들어선 것이다.
- 400년에는 백제가 가야,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를 구원하러 온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였다.
- 403년 왜와 가야를 끌어들여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404년에는 왜, 가야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였으나 그 때마다 패했다. 왜, 가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고구려를 경격하기 위한 청병사와 비슷하였다.
405-420년(15년) | 18대 전지왕 | 전지,영,전
- 아신왕의 아들
- 아신왕의 태자 도기(전지왕)는 왜에 있다가 405년 백제로 돌아가서 왕위에 오른다.
- 405년 아신왕이 사망하자 첫째 숙부 부여훈해가 임시 섭정을 맡았으나 막내 숙부 부여설례가 부여훈행를 시해하고 후임 임시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해충이 부여설례를 몰아내어 주살한 후 백제에 도착한 전지왕이 16세에 보위에 오르자 405년부터 408년까지 해충이 섭정을 맡았고 420년까지 천정하였다.
-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두번째 칠지도를 하사했다.
-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움
- 420년3월 향년31세로 죽었고, 아들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아들 구이신왕에게 양위하고 5년을 더 살다 사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 동진을 지배하였다.
420-427년 (7년) | 19대 구이신왕 | 구이신
- 전지왕의 장남
- 즉위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만치가 섭정하였다고 한다.
- 반란중에 살해 당하였다.
427-455년 (28년) | 20대 비유왕 | 비유,비
- 구이신왕의 아들 또는 전지왕의 서자.일설에는 구이신왕의 손자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 비유는 인교 청황(412-453)는 동일인이다
- 비유왕이 왜에서 낳은 아들 가수리(개로왕)를 왜왕 자리에 앉힌다. (왜왕: 사이)
- 427-428년까지 해충이 섭정하였고 428년부터 454년까지 친정하였고 454년부터 455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경사가 대리청정을 했다.
- 433년에 신라에 사자를 보내 친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의 수호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남조, 송,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반항하는 태세로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비유왕의 사망은 반란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유왕이 죽자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때는, 신라 눌지왕은 백제를 구원하는 정예군을 파견하였다.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 사례이다.
- 비유왕과 안코 천황은 같은 사람인가? (곤지의 아버지는 비유왕이다.)
455-475년 (20년) | 21대 개로왕 | 경사,경
-비유왕의 아들
- 일본 사이왕(443-455)이 개로왕이 되다
- 왜에 있던 가수리(개로왕)는 455년 백제로 가서 개로왕이 되었고, 동생 곤지가 왜왕인 고오(22년,455-477)가 되었고 바로 유랴꾸 천황(21대,22년,457-479)이다.
- 458년 8월 송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곤지)등 11인의 문무가 뛰어나고 충성스러우며 근면함을 말하곤 3품 관직의 제수를 청했다. 이때 관직을 제수받은 11인 가운데 8인은 여씨 즉 부여씨로 백제 왕족이었다.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을 보이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 부여곤지(여곤)는 459년 왕명으로 왜로 파견된다.
- 곤지: 개로왕의 동생, 비유왕의 아들이다. 개로왕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곤지에게 주었으며, 이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곤지가 이를 데리고 일본에 도착했을때 낳은 아들이 무령왕이다.
- 458년 규슈 다마나 일대에 살던 백제 이민 땅에 백제 왕족 여기가 우현왕으로 임명되면서 이곳도 백제 다무로가 생기게 되었다.
백제세력은 가야 지방과 한반도 규슈에 널리 다무로를 거느린 강대국으로 변모했고 그 세력 아래 범 백제 문화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침공으로 백제 세력이 꺽이면서 가야나 왜에 있던 다무로는 차츰 독립 왕국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친화 관계가 유지된다.
-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자 흙을 구어 성을 쌓았다.
- 461년 곤지가 개로왕을 만나러 백제에 다시 왔다. (이미 아들5명)
- 469년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고,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목책을 쌓아 북한산성의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는등 구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펼쳤다.
- 472년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사마,장무를 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위는 거절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아예 끊어버리고 말았다.
-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권위는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국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다.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처형되었다. 고구려군이 쳐들어 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고구려군의 재증걸루,고이만년 두 장수에게 붙잡혀 아차성 아래로 끌려가 처형되었는데, 이 두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친 자였다.
- 유랴쿠천황(곤지) 5년, 백제가 멸망당하자 고니키시 및 오오키사키,고니세시무등이 모조리 적에 손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멸망한 백제를 왜왕이 다시 일으켰다고 기록.
BC18- 28년2월 (46년) | 1대 온조왕 | 온조
- 제1대 백제국왕 (십제->백제)
- 주몽과 소서노의 둘째아들
- 9년, 마한멸망
28.2-77년 (49년) | 2대 다루왕 | 다루
- 온조왕의 아들
77년-128년 (51년) | 3대 기루왕 | 기루
- 다루왕의 아들
128년10월 - 166년 (38년) | 4대 개루왕 | 개루
- 기루왕의 아들
166년 - 214년 (48년) | 5대 초고왕 | 초고
- 개루왕의 장남
- 초고대왕 이래 160년부터 의자대왕의 660년까지 500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160년 초고왕자는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 이즈모에 건너가서 수진국의 왜여왕인 세오녀 히미코여왕을 사로잡아 일본 열도를 차지했다. 일본 히미코 즉 세오녀(가야인 연오랑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팔중성에 가두고 8명(아들5,딸3)의 자손을 낳았다. 이중 세오녀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메노오시호미이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구주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알알이이며, 알알이가 구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의 증조부가 스사노오(초고왕) 이다.
초고왕자는 다시 백제로 돌아와 초고왕이 되었다.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속고왕 또는 속고대왕이다. '신찬성씨록'에 유일하게 속고왕만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초고왕의 일본첫째왕자는 아메노오시호미(161년생), 일본둘째왕자는 첫째 신녀인 모치코가 낳은 아메노호히 와자로서 시마네현 귀족의 선조가 되었다.
셋째왕자는 아키코.하야아키쯔신녀가 낳은 아마쯔히꼬네로서 후쿠오카의 자성국조등의 선조가 되었다. 넷째 왕자는 미치코.오오미야가 낳은 이꾸쯔히꼬네이고 다섯째 왕자는 아야코 토요히메가 낳은 쿠마노쿠스비 이었다. 5왕자의 순서는 신녀의 순서다.
-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주몽검)를 규슈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주몽을 일본에서 쯔모왕이라고 했다. 초고대왕은 일본에 고주몽신사를 세워 고주몽 제사를 지내도록 주몽왕검을 보내준 것이며, 이는 히미코에게 왜국 왕권을 수여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주몽왕검은 일본의 삼보중에 첫째였다. 이 주몽왕검의 형식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우가미신은 백제계1대 대마도주 불합존이다. 동시에 단군시대 대마도주 언파불합이후로 51세 대마도주였으며, 그의 다른 이름은 야마토오 즉 왜남왕이다. (불합은 대마도를 의미한다) 1대 대마도주불합왕는 구수대왕인 대국주신의 권유로 대마도의 대산진신의 딸 타마요리히메를 이즈모로 초청하여 결혼하였고 이쯔세(184-238)를 낳았다.
대마도는 한개의 섬 이름이면서 실상은 두개의 섬이다. 파도 때문에 섬의 중간에서 아주 조금 합치지 못한 두개의 섬이지만 실상은 하나라는 뜻이 불합이다. (불합왕 = 대마도왕)
- 니니기(174-220)는 최초로 일본 천황이 된 신무천황(194-256)을 낳았다.
니니기는 구주에 와서 구수대왕의 후비였던 대마도의 해신 즉 오미미신의 딸 고노하나사쿠야히메와 결혼하여 칠삭동이 신무천황을 낳았다. 샤쿠야히메는 구수대왕의 세아들을 낳았었고, 네번째 아들이 니니기의 아들인 신무천황이다.
214-234년 (20년) | 6대 구수왕 | 구수
- 초고왕의 아들
- 구수왕은 초고왕의 딸인 수시리 공주와 결혼하여 일본의 대화에 진출하여 대국성에 살며 일본의 대국주신이 되었고 214년에 다시 백제로 돌아와 백제왕이 되었다.
구수대왕은 일본에서 귀수왕이다.
구수왕자는 초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를 정비로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나모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다스리는 오호쿠니누시가 되었다.
- 대국주신의 대국성은 오사카 대국정에 있었다.
234년 (1년) | 7대 사반왕 | 사반
- 구수왕의 장남
- 재위한 지 1년만에 폐위되었다.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이왕에 의해 폐위당함)
- 사반왕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효소천황이자 사대주신이 되었고 사반대왕의 딸은 신무천황의 비가 되었다.
신무천황도 초고대왕의 증손자이고, 신무천황비도 초고대왕의 증손녀다.
234-286년1월 (52년) 8대 고이왕 | 고이,구이,고모,구태
- 개루왕의 차남
- 활을 잘쏘고 무예가 뛰어났다.
- 풍납토성 축조
286-298년(12년) | 9대 책계왕 | 책계
- 고이왕의 장남
- 체격이 크고 사나웠다.
- 286년 위례성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대비해 사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
- 298년 한군이 낙랑과 맥인을 이끌고 침입했고, 백제가 패했고 책계왕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298-304(6년) | 10대 분서왕 | 분서
- 외모가 준수하여 왕위에 올랐다. 한군과의 전투에서 백제가 패하여 부왕이 사망하자, 어려서부터 왕위를 계승하였다.
- 한군에 강경책을 폈고 304년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경했을때 낙랑군 정예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304-344년(40년) |11대 비류왕 | 비류
- 구수왕의 차남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초고왕계가 왕위를 다시 가져온 것. -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 계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하여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 활을 잘 쏘았고 성품이 너그러웠다.
344-346년 (2년) | 12대 계왕 | 계
- 분서왕의 아들
- 계왕이 사망한 이후 고이왕통이 끊겼다
-비류왕의 차남 | 석촌동 3호분
-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 364년 가야의 부족국인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해 야마토 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 364년 7월(근초고왕19년) 갑자년7월에 백제왕은 구저,미주류,막고해를 보내어...(일본서기)
- 366년3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368년 신라를 존경하여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 두필을 신라에 선물하였다.
- 남으로는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54개 부족국가)을 통일하였다.
- 369년3월 왜는 아라다노와케,가고노와케를 장군으로 감고 가야 탁순국에 건너가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훼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 왜는 군사를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가서 남만의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치 주장: 왜가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했다고 주장)이에 그왕인 초고와 왕자 구수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 369년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군, 구모로성)에 쳐들어오자, 태자 근구수를 보내 크게 무찌르고 5천명의 고구려군을 사로 잡았다.
- 371년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패수(예강성)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대방 지역을 점령하였고, 여세를 몰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름:쇠)을 전사시켰다.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꽃아 효수하였다.
- 372년6월 동진에서 사신을 보내어, 백제왕 여구에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를 명하였다
- 372년에 근초고왕이 왜에 손자 침류를 왜왕으로 보내면서 그 상징으로 하사한 칼이 '칠지도'이다. | (칠지도와 칠자경)
현존하는 칠지도는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로 두번째 칠지도이다.
- 진나라때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였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귄의 땅을 점거해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주서백제전에 의하면, 백제는 동북으로 신라에,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 근초고왕의 즉위부터 20년(365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 때에 20년간 근초고왕은 무슨일을 했는가?
- 근초고왕의 아들
- 369년 태자 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 정벌을 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 369년 고구려를 크게 무찌르고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려 했으나 장군 막고해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 라고 조언하자 그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다시 침입하자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 시켰다.
- 376년11월 고구려 소수림왕이 백제 변경을 공격했다. 근구수왕은 377년10월 3만명의 병사로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이상기후가 겹치면서 제1차 여제전쟁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대패 하였다.
- 379년4월 하루종일 흑이 비처럼 내렸다. 380년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5월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장이 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382년 봄에 가뭄이 들어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결국 국가창고의 곡식을 푸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 근구수왕의 장남 | 이름: 부여 지
- 372년에 근초고왕이 왜에 손자 지를 왜왕으로 보내면서 그 상징으로 하사한 칼이 '칠지도'이다. | (칠지도와 칠자경)
- 384년에 왜왕 침류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다.
- 384년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 7월에 동진에 조공하였다.
- 9월 동진에서 호승 마라난타가 들어왔고 이를 계기로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다. 왕이 직접 마라난타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이후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두는등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백제는 불교를 통해 중앙 집권체제를 사상적으로 강화하고, 동진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고구려는 372년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457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마라난타는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역에서 동진으로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불교를 전파하는데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행 정도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라난타는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불교를 전파하였다. 마라난타의 교화에 힘입어 백제는 392년(아신왕 원년)2월에 '불법을 숭상하고 복을 구하라'라고 교서를 반포하게 된다.
------------- 유송의 시작과 끝 ----------------
1. 유송(劉宋)의 시작과 끝
건국: 서기 420년 (무제 유유가 동진의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
멸망: 서기 479년 (순제 유준이 소도성에게 선양하며 멸망, 이후 '남제'가 들어섬)
존속 기간: 약 59년
2. 유송 황제 가계도 및 즉위 연도
유송은 건국자 유유의 후손들이 제위를 이어갔으나, 후기로 갈수록 황실 내의 골육상쟁이 심화되어 왕조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1대 무제 (유유, 劉裕) | 420년 개국 황제
2대소제 (유의부, 劉義符) | 422년 무제의 장남
3대문제 (유의륭, 劉義隆) | 424년 무제의 셋째 아들 (소제의 동생)
(찬탈) (유소, 劉劭) 453년 문제의 장남 (부친 살해 후 잠시 찬탈)
4대효무제 (유준, 劉駿) | 453년 문제의 셋째 아들 (유소 처단 후 즉위)
5대 전폐제 (유자업, 劉子業) | 464년 효무제의 장남
6대 명제 (유욱, 劉彧) | 465년 문제의 열한 번째 아들 (전폐제 살해 후 즉위)
7대 후폐제 (유욱, 劉昱) | 472년 명제의 장남
8대 순제 (유준, 劉準) | 477년 명제의 아들 (후폐제 살해 후 옹립된 마지막 황제)
초기 (안정기): 무제 유유가 기틀을 잡고, 그의 아들 문제 유의륭이 30년간 통치하며 유송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중기 (혼란의 시작): 문제의 아들 유소가 아버지를 죽이는 참극이 벌어진 후, 효무제가 즉위하며 방계와 직계 간의 피바람이 부는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말기 (왕조의 몰락):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고 폭정이 이어지자 군벌이었던 소도성이 실권을 장악했다. 마지막 황제 순제는 소도성에게 자리를 내주며 유송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유송은 6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였지만, 육조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후 전개되는 남조 역사의 전형적인 '흥망성쇠' 모델을 보여주었다.
진사왕은 근구수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이다. 사람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지혜로워 지략이 많았다.
- 385년 아신왕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침류가 떠나고, 진사가 아신의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
- 386년 고구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을 쌓게 했다.
- 386년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 387년 봄 정월에 진가모를 달솔에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로 삼았다.
- 387년 9월에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관미령은 관미성과 연관되는 고개이다) 관미성은 파주 오두산성이다.
- 389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고 약탈하였다.
- 390년 9월에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고구려를 치라고 명령하니, 진가모가 도곤성(도압성)을 빼앗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진가모를 병관좌평에 임명하였다.
- 391년 4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적현성은 위치는 미상이다. 영광 또는 회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392년 7월에 고구려왕 담덕(광개토대왕)이 4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
- 392년 10월에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빼앗았다.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주변을 둘러쌓다. 파주 오두산성이 관미성
- 392년11월 진사왕은 침류왕과 아신의 세력에 의해 제거 되었다. (죽음)
- 390년 오진을 고마확고로 책봉한다 . 오진천황의 이름은 호무다 와께(본명:진예)이다. | 와께는 백제가 후황에 붙이던 호칭 내지 벼슬이다. 호무다는 지명이름 (고마->호무), 고마는 공주의 옛이름이다.
오진은 진씨이고 공주(고마)지역의 권력가. 왕족다음으로 권세가 막강한 진씨네 영토였다. 백제 왕족 여씨의 외척으로서 대대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후왕이었다. 후왕인 호무다 와께는 396년 광개토대왕이 고마에 있던 가바라(옛 공주) 성을 칠때 왜로 떠났다.
-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수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58개성을 공취하고 풍납토성을 포위했다. 백제는 출병해 맞서 싸웠으나 대패 하였다.
아신왕은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굻고 남녀포로1000명과 가는배 1000척을 주고, 광개토대왕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신하가 되겠소' 라고 하고, 고구려의 신하국이 되기로 맹세한다.(비문)
광개토 대왕은 백제왕을 죽이지 않고 조공만 받고 용서한다. 항복 시켜서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복의 왕.
- 397년 오진은 왜(대왜)에 나라를 세웠다. 443년즈음 진씨를 여씨로 성을 바꿨다.
- 오진천황 321-430 (재위기간 397-430) | 일본 최초의 천황
- 오친천황의 아들 인덕천황(닌토쿠천황)이 다이센릉의 주인이다.
하지만 다이센릉의 실제 주인은 유랴쿠천황(곤지)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업적)
(오진천황-인덕천황-리추천황-한제이천황-인교천황-안코천황-유랴쿠천황)
- 오진3년(399) 신하(키노쯔네수쿠네등)를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왕으로 세웠다. [일본서기]
그 동기는 391년 고구려 침공때 진사왕은 나라를 살피지 않고 사냥만 했기 때문이다.
392-405년 (13년) | 17대 아신왕 | 아신,아방,아화,아미
- 침류왕의 장남 |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다.
- 392년11월 아신왕이 즉위하였다.
-
- 393년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진무는 1만의 병력으로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무너뜨리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 393년 8월에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무는 군사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성등 다섯 성을 되앛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가 이어지지 않자 여의치 않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394년 2월에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이복동생 홍을 국정을 총괄하는 내신좌평에 임명하였다.
- 394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하였다.
- 395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왕 담덕이 몸소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패수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000명 이었다.
- 395년11월에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죽자 군대를 돌려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백제는 수곡성과 패서성에서 싸웠으나 번번이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아현성을 쌓는등 전시 체계를 유지하였다.
- 396년(아신왕 5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64개성.촌을 빼앗기고 대신과 장사 10여명을 인질로 보내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고구려의 침공으로 어려운 고비를 맞고 백제 세력은 왜로 뻗게 되었다.
- 397년 5월에 왕이 태자 전지를 왜국에 보내어 왜와의 군사적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 398년 2월에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진무가 형식상 병관좌평으로 승진했지만 실제적인 군령권은 좌장에게 있기 때문에 군사 부분에서는 2선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사두는 좌장으로 임명되어 군사 부분을 장악하였다. 이는 진씨 세력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것에 한계를 느끼고, 지방 세력인 사씨 세력을 등용함으써 총력전을 전개하려는 조치로 본다.
- 398년 쌍현성을 쌓았다. (쌍현성은 장단의 북쪽에 위치한 망해산의 쌍령 부근으로 추정한다)
- 398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 큰 별이 군영 내에 떨어졌는데 큰 소리가 났다. 왕이 매우 꺼려하여 곧 정벌을 그만 두었다.
- 399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이 전역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동망치니 호구(인구)가 줄어들었다.
- 400년에는 백제가 가야,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를 구원하러 온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였다.
- 402년 5월에 왜국으로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큰 구슬은 왜국 특산품의 하나로 여의보주이다. 이는 광명주를 지칭하는 것이다. 광명주는 '그 색깔이 푸르고 큰 것은 달걀만하며, 밤이면 광채가 나서 마치 물고기 눈의 정기와 같다'라고 한다. 구슬은 중요한 위세품으로서 칼.동경과 더불어 중앙에서 지방의 수장층에게 수여하거나 국가간의 교섭때 상징적인 예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403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이르럿다. 왕이 맞이하여 위로하였는데, 특별히 후하였다.
- 403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왜와 가야를 끌어들여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 404년에는 왜, 가야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였으나 그 때마다 패했다. 왜, 가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고구려를 경격하기 위한 청병사와 비슷하였다.
- 405년 9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405-420년(15년) | 18대 전지왕 | 전지,영,전
- 아신왕의 아들
- 아신왕의 태자 도기(전지왕)는 왜에 있다가 405년 백제로 돌아가서 왕위에 오른다.
전지왕은 이름을 영이라고 하였다.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3년(394)에 태자가 되었고, 6년(397)에 왜국으로 갔다. 14년(405)에 왕이 돌아가시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대신 다스리면서 태자가 나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앙의 막내 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에서 부고를 듣고 소리내어 울면서 돌아가기를 청하니 왜왕이 군사 100명으로 호위하며 보냈다. 이윽고 국경에 으르자 한성사람 해충이 와서 알리기를,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동의 동생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여 스스로 지키면서 바다의 섬에 의지하여 기다렸더니 나라사람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이니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해충은 한성사람으로 북부에 기반을 둔 해씨 세력의 일원이다. 전지왕이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연고로 달솔로 임명되고 한성의 곡물 1천석을 부상으로 받았다.
전지와의 즉위에는 해충을 비롯한 해씨 세력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으며, 이에 진씨를 대신하여 해씨가 국정을 장악하는 등 귀족세력이 재편되었다. 전지왕때 등장하는 해충과 해수,해구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따라 전지왕 이후 삼근왕까지 5대에 걸쳐 해씨에게 왕비가 나오던 시대를 '진씨왕비족 시대'와 대비시켜 '해씨왕비족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팔수부인은 전지의 즉위에 공을 세운 해씨 세력의 일원으로 보인다. 각각 내법좌평과 병관좌평으로 임명된 해수와 해구가 왕의 인척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 405년9월에 진지왕이 즉위하였다.
- 405년 아신왕이 사망하자 첫째 숙부 부여훈해가 임시 섭정을 맡았으나 막내 숙부 부여설례가 부여훈행를 시해하고 후임 임시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해충이 부여설례를 몰아내어 주살한 후 백제에 도착한 전지왕이 16세에 보위에 오르자 405년부터 408년까지 해충이 섭정을 맡았고 420년까지 천정하였다.
- 406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406년 9월에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곡물 1000석을 주었다.
- 407면 2월에 이복동생 여신을 내신좌평에 임명하고, 해수를 내법좌평에 임명하고,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하니 모두가 왕의 친척이다.
여신은 백제 왕족으로 내신좌평과 상좌평을 역임하였고, 비유왕 3년(429) 사망하였다.
전지왕은 오랫동안 왜국에 체류하여 국내의 지지기반이 미약하였는데, 해씨 집단을 외척으로 삼으면서 지지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해씨 세력의 독주가 염려되어 왕족인 여신을 왕명의 출납에 관한 일을 맡는 내신좌평으로 임영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영하여 국정을 총괄하게 한것은 그에 대한 신임도가 절대적이었으며, 전지왕대의 핵심적인 인물임을 알려준다. 전지왕은 이처럼 해씨 세력과 왕족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 408년 봄 정월에 여신을 상좌평에 임명하여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맡겼다. 상좌평이라는 직책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지금(고려)의 총재와 같다.
-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두번째 칠지도를 하사했다.
- 409년에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니 왕이 도타운 예로 대우하였다.
야명주는 어두운 밤에도 빛을 낸다고 전해지던 귀중한 구슬을 말한다. 왜국의 특산물이었다.
-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움
- 416년에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안제는 동진의 제11대 황제로 재위기간은 397년~418년이다. 이름은 덕종이며, 효무제의 장자이다.
사지절: 절을 지닌 사신이라는 뜻이다. 왕의 명령을 받고 먼 길을 떠나는 관료가 대나무와 옥으로 만든 신표를 들고 가른 뒤 한쪽은 조정에 보관하고 다른 한쪽을 지님으로써 신분을 표시한 데서 유래하였다. 중국에서는 3세기에 군사를 지휘하는 관료에게 사지절,지설,가절등 3등급의 벼슬을 주었다. 사지절은 이천석 이하를 저형할 수 있고, 지절은 관위가 없은 사람만 처형할 수 있으며, 가절은 오직 군사와 관련해서 군령을 어긴 자만 처형할 수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주의 총관들은 모두 사지절을 칭하고 자사는 지절을 창하였으며, 나중에 절도사도 지절을 칭하다가 폐지되었다. '송서'백관지에도 사지절,지절,가절 3등급의 권한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도독백제제군사: 도독제군사는 위나라 문제때 처음 만든 벼슬로서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군대를 총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으며 자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군사권의 상하 관계를 나타내는 가호에는 도독,감,독의 3종류가 있는데 이중 도독이 가장 높았다. '도독제군사'는 절을 부여받은 장군이 독자적인 권한으로 통감할 수 있는 군사기구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독백제제군사'는 백제 지역의 군사를 통감한다는 의미이다.
진동장군: 진서,진남,진북 장군과 함께 4진 장군으로 불리며, 중국 후한 말엽의 196년경 조조가 진동장군이었다는 '후한서' 헌제기의 기록이 첫 사례이다. 3세기 위나라 때에는 4정 장군과 함께 2품에 해당하고 일부 자격을 갖춘 자만 대장군이라 하였으니, 진나라 때에는 3품에 해당하고 대장군은 2품에 공을 더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남조의 송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 417년 4월에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 417년 7월에 동부와 북부의 2부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았는데, 병관좌평 해구에게 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사구성: 병관좌쳥 해구가 감독관이 되어 쌓은 성이다. '광개토왕릉비'역락17년(407)조의 기사에 나오는 사구성과 같은 성으로 보인다.
- 420년3월 왕이 돌아가셨다. 향년31세로 죽었고, 아들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아들 구이신왕에게 양위하고 5년을 더 살다 사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 동진을 지배하였다.
[역사적 고찰] 사구성과 육계토성의 동일성 분석
백제 전지왕 13년(417년)에 축조된 **사구성(沙口城)**이 파주 **육계토성(六溪土城)**이라는 학설은 최근 고고학적 성과와 지형 분석을 통해 가장 유력한 정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1. [점(Point)] - 지명과 지형의 일치성
어원적 근거: '사구(沙口)'는 '모래가 쌓이는 입구'를 뜻합니다. 육계토성이 위치한 파주 적성면 주월리는 임진강의 물줄기가 크게 휘어지며 퇴적층이 형성된 곳으로, 지형적으로 **'사구(沙口)'**라는 명칭과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 407년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사구성(沙溝城)**과 삼국사기의 사구성(沙口城)은 동일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가 한강으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임진강 변의 핵심 '점'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2[선(Line)] - 임진강 방어선의 중심축
전략적 배치: 417년 전지왕은 동부와 북부의 인력을 대거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았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 루트인 **임진강-예성강 라인(Line)**을 방어하기 위한 국가적 총동원이었습니다.
하북위례성으로의 연결: 육계토성은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최전방 '차단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곳이 뚫리면 하남 위례성(풍납/몽촌토성)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는 생명선이었습니다.
[면(Plane)] - 도성급 규모와 고고학적 증거
판축 기법의 확인: 최근 발굴 조사 결과, 육계토성은 백제 중앙 정부의 고도의 토목 기술인 **판축 기법(흙을 층층이 다져 쌓는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보루가 아닌 왕실 주도의 도성급 공사였음을 증명합니다.
출토 유물의 격: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백제 초기 직구단경호(입이 곧은 단지)와 기와들이 대거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육계토성이 백제 왕실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던 '면적 거점(Plane)', 즉 하북위례성급의 위상을 가졌음을 뒷받침합니다.
사구성을 육계토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라는 거대 세력에 맞서 **'임진강이라는 천혜의 해자(선)'**를 활용해 **'하북위례성(면)'**이라는 전진기지를 구축했음을 의미합니다.
417년의 축성 의미: 아신왕 대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북방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전지왕이 임진강 변의 육계토성을 사구성으로 명명하고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재건축한 것입니다.
420-427년 (7년) | 19대 구이신왕 | 구이신
420-427년 (7년) | 19대 구이신왕 | 구이신
- 전지왕의 맏아들 이다. 전지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 즉위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섭정하였다고 한다.
- 424년 장사, 장위를 파견하여 송에 조공하였다. (송서)
- 427년 1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반란중에 살해 당하였다.
427-455년 (28년) | 20대 비유왕 | 비유,비
427-455년 (28년) | 20대 비유왕 | 비유,비
- 구이신왕의 맏아들 또는 전지왕의 서자.일설에는 구이신왕의 손자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송서에는 여비로 나오는데, 이는 왕의 이름 부여비유를 중국식으로 단철음화한 것이다. 비유왕은 7년(433)에 신라에 화친을 청하여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항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 비유는 인교 청황(412-453)는 동일인이다
- 비유왕이 왜에서 낳은 아들 가수리(개로왕)를 왜왕 자리에 앉힌다. (왜왕: 사이)
- 427년12월에 비유왕은 구이신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 428년 2월에 왕이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차등 있게 주었다.
4부: 동.서.남.북 부의 4부를 말한다.
- 427-428년까지 해충이 섭정하였고 428년부터 454년까지 친정하였고 454년부터 455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경사가 대리청정을 했다.
- 429년 가을에 사신을 송나라로 보내 조공하였다.
송나라는 동진의 권신 유유가 420년에 공제로부터 선위를 받아 세웠으며, 건강(현재의 중국 장쑤성의 난징)에 도읍하였고 , 479년 소도성에게 망하였다.
- 429년 10월에 상좌평 여신이 사망하자 해수를 상좌평으로 삼았다.
- 429년 11월에 지진이 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렸다.
- 430년 4월에 송나라의 문황제는 왕이 다시 조공에 힘쓰므로, 사신을 보내 선왕 영의 작호를 책봉해 주었다.
전지왕(腆支王) 12년(416)에 동진(東晉)이 책봉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문황제(文皇帝) : 유송의 제3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424~453년이다. 무제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의륭(義隆)이다.
- 433년 7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 434년 2월에는 좋은 말 두필을, 9월에는 다시 흰 매를 보내는 등 신라에 적극적인 구애를 하였다. 이에 신라도 그해 겨울 10월에 금과 명주로 답례하여 두나라가 화친 관계로 전환 하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자 백제는 송나라 및 왜국과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이제까지 적대적이었던 신라에 화친을 청하여 반 고구려 연합전선을 피셔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한 것이다. 신라는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의 평양 천도 및 남하정책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끼는 등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었다. 이러한 백제와 신라와의 화친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대체로 나제동맹이라 칭한단. 나제동매응 433년에서 554년으로 본다.
- 434년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좋은 말 두필을 주었다.
- 434년 9월에 다시 신라에 흰 매 를 보냈다.
- 434년 10월에 신라가 좋은 금과 구슬로 답례하였다.
433년에 신라에 사자를 보내 친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의 수호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남조, 송,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반항하는 태세로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비유왕의 사망은 반란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유왕이 죽자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때는, 신라 눌지왕은 백제를 구원하는 정예군을 파견하였다.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 사례이다.
- 440년에도 송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비유왕은 중국 유송과 빈번한 교류를 하였다.
- 447년 7월에 가뭄이 들어 곡식이 익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흘러 들어간 자가 많았다.
- 454년 8월에 누리떼가 곡식을 해쳐 흉년이 들었다.
누리: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 (초고왕208,211년8월, 비류왕321년7월, 무령왕521년 8월에도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
- 455년 9월에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사이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더니 날아가 버렸다.
검은 용: 검은 용의 출현은 변고로 이어지는 흉조의 조짐으로 본다.
- 455년 9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 비유왕과 안코 천황은 같은 사람인가? (곤지의 아버지는 비유왕이다.)
455-475년 (20년) | 21대 개로왕 | 경사,경
455-475년 (20년) | 21대 개로왕 | 경사,경
-비유왕의 아들
- 일본 사이왕(443-455)이 개로왕이 되다
- 왜에 있던 가수리(개로왕)는 455년 백제로 가서 개로왕이 되었고, 동생 곤지가 왜왕인 고오(22년,455-477)가 되었고 바로 유랴꾸 천황(21대,22년,457-479)이다.
- 455년9월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 458년 8월 송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곤지)등 11인의 문무가 뛰어나고 충성스러우며 근면함을 말하곤 3품 관직의 제수를 청했다. 이때 관직을 제수받은 11인 가운데 8인은 여씨 즉 부여씨로 백제 왕족이었다.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을 보이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 부여곤지(여곤)는 459년 왕명으로 왜로 파견된다.
- 곤지: 개로왕의 동생, 비유왕의 아들이다. 개로왕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곤지에게 주었으며, 이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곤지가 이를 데리고 일본에 도착했을때 낳은 아들이 무령왕이다.
- 458년 규슈 다마나 일대에 살던 백제 이민 땅에 백제 왕족 여기가 우현왕으로 임명되면서 이곳도 백제 다무로가 생기게 되었다.
백제세력은 가야 지방과 한반도 규슈에 널리 다무로를 거느린 강대국으로 변모했고 그 세력 아래 범 백제 문화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침공으로 백제 세력이 꺽이면서 가야나 왜에 있던 다무로는 차츰 독립 왕국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친화 관계가 유지된다.
-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자 흙을 구어 성을 쌓았다.
- 461년 곤지가 개로왕을 만나러 백제에 다시 왔다. (이미 아들5명)
- 469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 469년 10월에 쌍현성을 수리하였다.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우고,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고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펼쳤다.
-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전하다.
18년(472) 위(魏)나라註 001에 사신을 보내 조알(朝謁)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註 002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승냥이와 이리註 003가 길을 막으니, 비록 대대로 영험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藩國)註 004의 예를 받들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註 005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미약하나마 응하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에 잘 조화하시는지라 우러러 뵙고 싶은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私署]註 006 관군장군(冠軍將軍)註 007 부마도위(駙馬都尉)註 008 불사후(弗斯侯)註 009 장사(長史)註 010 여례(餘禮)註 011와 용양장군(龍驤將軍)註 012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註 013 장무(張茂)註 014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서 만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바치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영험이 크게 덮어주셔서 천자의 조정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펼쳐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註 015고 해도 영원토록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扶餘)에서 나왔기에註 016 선대에는 예전의 우의를 돈독하게 유지하였으나 그 조상인 쇠(釗)註 017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볍게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조상인 수(須)註 018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재빠르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이 잠시 오가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였습니다.註 019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註 020 남은 무리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오자註 021 추악한 무리들이 점점 번성해져서註 022 마침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병화(兵禍)가 이어진 지 30여년이 되니 재물이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약 천자의 자비와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멀리까지 예외 없이 미친다면 속히 한 명의 장수를 보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미천한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척의 땅과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금 연(璉)註 023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아註 024 죄가 차고 악이 쌓였으며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적기요, 〔폐하의〕손을 빌려야 할 때입니다. 또 풍씨 일족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이 있고,註 025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註 026 천자의 위엄[天威]을 한번 일으키신다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註 027 신은 비록 명민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 바쳐 마땅히 예하의 군대를 이끌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하겠습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거스르거나 속이는 일은 한 번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註 028가 번국(藩國)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소행을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註 029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註 030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면서 폐하의 책략을 능멸하려고 도모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註 031은 대단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註 032에서 〔묘족(苗族)을〕 징벌하였고, 맹상군(孟嘗君)註 033은 어진 사람으로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약 〔고구려를〕 취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註 034 이후에 신이 〔나라의〕 서쪽 경계인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註 035의 바다 가운데서 시신 10여 구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과 기물(器物), 안장과 굴레를 얻었는데, 그것을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는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기다란 뱀註 036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마음 속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 옛날 송(宋)나라註 037가 신주(申舟)를 죽이자 초(楚)나라註 038 장왕(莊王)註 039이 맨발로 뛰어나갔고,註 040 놓아준 비둘기를 새매가 낚아채자 신릉군(信陵君)註 041은 먹지를 않았습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무릇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그 기개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모으시고, 그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게 할 만한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註 042가 천자에게 가는 길에 걸터앉아 가로막게 하십니까? 지금 습득한 안장 하나를 올리니 이로써 사실을 징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현조(顯祖)註 043는 〔백제가〕 궁벽지고 먼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하였다고 생각하여 예우를 더욱 두텁게 하고, 사신 소안(邵安)註 044을 파견하여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문을 받고 별 탈이 없다고 들으니 매우 기쁘오. 경이 동쪽 구석 오복(五服)註 045 밖에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기쁘고 가상히 여겨 마음속에 담아두겠소.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해서 많은 백성[群生]들을 다스리고 있소. 지금 온 세상이 깨끗이 하나가 되고 팔방(八方)에서 귀의하여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조화로워지고 병사와 군마가 강성해진 것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보았소.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능멸과 침범을 당했으나 진실로 의(義)에 따르고 인(仁)으로써 지킬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해 또 무엇을 걱정하겠소? 앞서 보낸 사신註 046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註 047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가 없었소. 경이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보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소.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반드시 그렇다고 여기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아니 되오. 〔고구려를〕 경략(經略)하는 방편과 요지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놓았소.”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역의 험준함을 믿고 경의 영토를 자주 침범하며, 선대 임금의 옛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커다란 덕을 버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먼 변경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대가 보낸〕 사신은 신서(申胥)註 048의 정성註 049을 겸비하였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같은 위급함註 050이 있으니, 이에 마땅히 의로움을 펼치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군대를〕 일으켜야 할 것이오. 다만 고구려가 선대의 조정에서부터 번국(藩國)이라 칭하면서 조공을 한 지가 오래 되었소. 저들에게 비록 예로부터 흠이 있지만, 우리나라[북위]에는 아직 명령을 어긴 허물이 없소.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바로 정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사안과 시기를 깊이 따져보니 사리가 또한 충분하지 않소. 그래서 지난해註 051에 여례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상황을 조사하고자 하였소.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차례 주청(奏請)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이 그 주청을 억누를 수 없었고, 법을 담당한 사람도 그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아뢰는 바를 듣고, 조서를 내려 여례 등을 돌아오게 하였소. 만약 지금이라도 다시 짐의 뜻을 어긴다면 과오와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나중에 비록 스스로 말한다 하더라도 죄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런 다음에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이 의(義)에 합당하오. 구이(九夷)註 052의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너머 살면서 도(道)가 신장된다면 번국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거두면 자기 영토를 보전할 뿐이었소. 그러므로 기미(羈縻)註 053〔의 일〕은 옛 전적에 드러나 있으나 세시(歲時)에 호시(楛矢)註 054를 바치는 일은 빠뜨리기도 하였소. 경은 강약의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역대의 행적을 모두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견주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지만, 큰 규칙과 큰 책략은 그 도달하고자 하는 바가 여전히 있소. 지금 중국이 하나로 평정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드높이고 국경 밖에 깃발을 매달며, 궁벽진 지방의 백성들을 구하고 먼 지역까지 황제의 위풍을 펼치려고 하였으나, 진실로 고구려가 곧바로 진술하였기 때문에 아직 정벌을 점칠 단계에 미치지는 못하였소. 지금 만약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가져온 계책이 짐의 뜻과 일치하므로 대군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지 않을 것이오. 〔경은〕 곧 미리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함께 일으킬 수 있도록 갖추어 일을 기다리고, 때때로 보고하는 사신을 보내어 〔짐이〕속히 저쪽의 정황을 알 수 있도록 하시오.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길을 안내하는 선봉에 선다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소? 헌상한 비단과 해산물은 비록 다 이르지 않았으나 경의 지극한 마음을 밝혔으니 지금 여러 물품을 별지와 같이 주겠소.”
〔현조는〕 또 연(璉, 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은 예전에 여경(餘慶, 개로왕)과 원수진 일註 055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소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조서를 내려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소안 등에게 동래(東萊)註 056에서 바다를 건너가 여경에게 옥새가 있는 문서[璽書]를 하사하여 그 정성과 충절을 포상하려고 하였으나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들이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끊었다.註 057
- 472년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사마,장무를 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위는 거절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아예 끊어버리고 말았다.
-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권위는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국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다.
- 475년9월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처형되었다. 고구려군이 쳐들어 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고구려군의 재증걸루,고이만년 두 장수에게 붙잡혀 아차성 아래로 끌려가 처형되었는데, 이 두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친 자였다.
- 유랴쿠천황(곤지) 5년, 백제가 멸망당하자 고니키시 및 오오키사키,고니세시무등이 모조리 적에 손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멸망한 백제를 왜왕이 다시 일으켰다고 기록.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註 001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註 002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군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고 백제에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승려 도림(道琳)註 003이 응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소승이 아직 도(道)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은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신을 어리석다 여기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시키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몰래 보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가 백제로 들어갔다. 당시 백제왕 근개루(近蓋婁)註 004는 장기와 바둑[博奕]註 005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마침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매우 두텁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한 가지 기술만 바쳤을 뿐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라건대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림이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풀어주신 험한 요새이지 사람이 만든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단지 받들어 섬기기를 원할 뿐이며 〔다른〕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많은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하건만, 성곽이 수리되지 않고 궁실도 고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이 맨땅에 임시로 묻혀있고註 006 백성의 집들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지니 신은 대왕께서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맞소! 내가 장차 그리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註 007 그 안에 궁궐과 누각과 전망대와 건물註 008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註 009에서 큰 돌을 가져다 덧널[槨]註 010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註 011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검단산)註 012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아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가 아뢰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장차 백제를 정벌하려고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었다. 근개루가 그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註 013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어 이 지경이 되었다. 백성이 쇠잔하고 군사가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느냐.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註 014에서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註 015․조미걸취(祖彌桀取)註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註 021 제우(齊于)註 022·재증걸루(再曾桀婁)註 023·고이만년(古尒萬年)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註 026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南城)註 027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註 028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註 029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註 030
왕인박사 약력
출생: 백제 근구수왕 (서기375~384년)때에 영암군 군서면 성기동(현재 도구림리)에서 출생
8세때 문산재에 입문
18세때 오경박사에 등용
32세때 일본국 초청으로 도일 | 논어10권과 천자문 1권 가지고 감.
업적: 일본(아스카)문화의 원조, 일본태자(토도치랑자)의 사부, 정치고문으로 논어, 전자문등을 전수, 글과 문장 학문의 스승
기술, 공예, 가용의 창시등 일본문화의 원조로 추앙
묘역: 일본 대판부 매방시(오사카 히라카타시)소재 대판부 사적 13호지정(1938년5월)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아좌태자는 창(위덕)왕의 죽은 아들이다.
웅진시대 | 475 - 538년 (63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475-477년 (2년) | 22대 문주왕 | 문주,문원,모도,도
- 개로왕의 아들 또는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의 성격은 결잔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 475년 목협만치(소아만지)가 일본으로 넘어감
- 475년 고구려가 공격하자 개로왕의 명을 받아서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의 군대가 물러갔으나, 수도 한성이 파괴되었다.
- 475년 음력10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 476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기뻐하여 그 탐라국 사신을 보답으로 은솔로 임명하였다. 탐라왕게게 백제의 높은 벼슬인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 477년4월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는데, 9월에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 당했다.
-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보이자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켜 후에 문주왕에 2년만에 귀족인 해구에게 살해되고, 문주왕의 장남 삼근왕이 즉위한다.
- 문주왕은 남하정책을 펼치던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위례성 일대에서 전투도중 고구려군의 첩자(해구)에 속아,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
477-479년(2년) | 23대 삼근왕 | 삼근
문주왕의 아들
- 13세에 즉위한다. 그러나 해구의 섭정으로 사실상의 실권은 해구가 장악하였다.
- 478년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왕위를 찬탈하려고 대두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좌평 진남에게 군사 2000을 주어 대두성을 공격하고 덕솔 진로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해구를 추격해 죽이게 했다. 진남과 진로에 의해 해구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왕위는 불안정하였다. 그리고 공모자인 연신이 고구려로 두주하자 연신의 3족을 멸해 거리에 매달았다.
- 479년 봄,여름 가뭄이 매우 심했고 11월에 갑자기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15세 사망)
- 2년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한채 서거한다.
- 곤지왕(유랴쿠천황)이 456년12월25일 왜왕으로 즉위한다 (456년12월25일-479년9월8일) | 인교천황의 제5황자이고, 안코 천황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다 .
479-501년(22년) | 24대 동성왕 | 동모대,마모,마제
- 문주왕의 조카 또는 사촌, 좌평 곤지의 둘째아들 (왜에 있던 곤지의 영향력)
- 동성왕은 무령왕의 이복형제
- 삼근왕이 살해되자 아버지 곤지에 의해 백제로 보내져, 10세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친정을 시작한 때는 재위 8년 486년이다.
- 481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의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에는 중국 남조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485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 488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493년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삼고, 494년과 495년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웅진 천도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499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의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 봄에 동쪽에 임류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게 여겨 궁궐의 문까지 당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 501년 음력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쳥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졌고, 현장에서 바로 사망하지 않고, 부상을 입은채 웅진성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12월에 사망했다. (32세 사망)
- 백가(귀족)가 자객을 시켜 동성왕을 살해함. 사비천도를 반대하는 웅진파
- 500년 게이타이 천황(500-531년) 즉위, 곤지의 셋째 아들이다.
501-523년 (22년) | 25대 무령왕(사마) | 사마,융
곤지의 장남 | 62세 사망
- 왜왕 부(478-501) = 무령왕은 동일인다
- 일본 계체천황(남제왕) 은 곤지의 셋째아들
- 503년 아우인 게이타이 천황(계체천황)에게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보낸것이 청동거울인'인물화상경'이다.
- 513년 태자 순타가 죽었다.
- 왜 5왕: 찬(리추),진(한제이),제(인교),흥(안코),무(유랴쿠) | 이 중 무왕이 곤지왕이다. 곤지왕(재위기간: 477-502) | 오오키미
- 526년 무령왕이 죽고 3년후에 무령왕비(둘재부인,성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 22담로:
-479-501년(22년) | 24대 동성왕 | 동모대,마모,마제
- 문주왕의 조카 또는 사촌, 좌평 곤지의 둘째아들 (왜에 있던 곤지의 영향력)
- 동성왕은 무령왕의 이복형제
- 삼근왕이 살해되자 아버지 곤지에 의해 백제로 보내져, 10세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친정을 시작한 때는 재위 8년 486년이다.
- 481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의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에는 중국 남조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485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 488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493년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삼고, 494년과 495년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웅진 천도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499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의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 봄에 동쪽에 임류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게 여겨 궁궐의 문까지 당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 494년3월(동성왕15년)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한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때 특이한 것이 자신의 기반인 왜와 멀어졌다는 것이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을 해서 고구려에 대항 하였다.
동성왕은 임류각에서 독단적인 정치를 하였다. 동성이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대궐문을 닫아버렸고 22년5월 임류각에서 잔치를 배풀고 밤새도록 실컷 즐겼다.
일본에 같이 넘오온 세력도 멀리하였다. 여고,여력,여고를 지방으로 보내어 배척하였다.
- 501년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진수케 하였으나 백가가 가지 않으려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왕이 허락하지 아니했다.
- 501년 음력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쳥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졌고, 현장에서 바로 사망하지 않고, 부상을 입은채 웅진성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12월에 사망했다. (32세 사망)
- 백가(귀족)가 자객을 시켜 동성왕을 살해함. 사비천도를 반대하는 웅진파
- 사 연 해 진 백 국 목
해진: 한성 귀족층
백: 신진세력을 포함한 반동성왕 세력이 생김
삼국사기:
일본서기: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포학하여 나라사람들이 그를 제거하고 무녕왕을 세웠다.
- 500년 게이타이 천황(500-531년) 즉위, 곤지의 셋째 아들이다.
-501-523년 (22년) | 25대 무령왕(사마) | 사마,융
개로왕의 아들 | 462년생으로 추정(이유 502년 40세에 왕에 즉위하였기 때문임)
개로왕이 죽고, 곤지의 장남 | 62세 사망
- 462년 6월 가카라시마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
임신한 부인은 개로왕의 말처럼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사마'라 하였다.
개로왕은 462년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려, 동생 곤지를 왜의 좌현왕으로 임명하였고 이때 임신한 아내를 함께 보냈다. 출산을 앞둔 개로의 아내가 산통을 시작하여 가카라시마의 동굴에서 무령왕이 탄생한 것이다.
개로왕은 이 아이를 다시 백제 본국으로 보내라고 하며 동생 곤지에게 아내를 맡기었다.
-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고 왕자들도 모두 죽었다. 곤지에게 맡긴 무령왕만 살아 남은 것이다.
무령왕은 아스카베에서 자랐다. 현재 아스카베신사는 곤지의 신사이고, 매년 10월16일이 곤지의 제삿날로 매년 가을 마쓰리를 진행한다.
- 왜왕 무(478-501) = 무령왕은 동일인다 | 16세에 왜왕즉위
- 478년 왜 무왕이 송 순제(유준)에게 보낸 상표문: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데 결연히 대처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닥쳐온 제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긴 세월을 거상 중에 있게 되었사옵니다.
478년은 무령왕이 16세로 추정됨.
----------------------------백제 무령왕 -------------------------------
- 501년 12월 동성왕이 죽고, 502년(40세) 무녕왕이 즉위하였다.
- 502년11월 달솔 우영을 시켜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구구려의 수곡성을 치게 하였다. 단계현(현재 황해도 신계)은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이다.
무령왕의 제1의 목표는 고구려를 치는 것이었다. 수곡성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 503년11월, 고구려 변경 공격 (임진강 유역의 성곽군: 연천군,파주,양주 일대)
변경은 임진강 라인에 배치된 고구려의 전진 기지들을 의미함.
방어선: 예성강(패하)과 임진강 (황해도 신계, 금천에서 경기도 연천으로 이어지는 선) | 무령왕은 고구려가 한강으로 내려오는 통로인 이 선을 타격함으로써, 백제의 빼앗긴 한성을 되찾고자 하였다.
- 일본 계체천황(남제왕) 은 곤지의 셋째아들
- 503년 아우인 게이타이 천황(계체천황,남제왕)에게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보낸것이 청동거울인'인물화상경'이다.
오사카의 관리를 시켜 만들어 보낸 인물화상경은 상왕이 하왕에게 보내는 신임의 표식이라고 한다.
- 504년9월, 고구려 고목성을 고격한 말갈을 군사 5000을 보내 격퇴하였다.
- 505년, 고구려 장수 고로를 수곡성(예성강)에서 격퇴하였다. 이 전쟁의 승리는 백제가 한수(한강) 이북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 510년(무령왕 10년) 국내외의 놀고먹는 자들을 몰아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일하지 않는 실업자를 파악해 농토 개간에 투입하라는 무령왕의 지시였다.
벽골제: 농업기반시설인 벽골제는 농업경제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백제 저수지 시설이다. 가뭄걱정없이 저수조에 저장된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 것이다.
- 512년 고구려의 대군이 국경을 넘어 백제 지역을 장악했다.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원산성을 깨뜨렸다 (삼국사기)
고구려에 대적할 군사는 3천명, 무령왕은 직접 출정하겠다고 하였다. 고구려군은 적은수의 백제군을 앝잡아 보았다. 무령왕은 고구려를 방심하게 한후 틈을타서 급습하였다.
왕이 기계를 내어 갑자기 습격하여 고구려 군을 크게 깨뜨렸다 (삼국사기)
- 513년 태자 순타가 죽었다.
-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이 현 일본천황의 시조인 칸무천황의 어머니이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고 이름은 신립이다.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다. (속일본기 칸무천황)
그렇다면 아버지는 누구일까?
순타태자의 일본 파견은 무령왕의 대일본 정책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을 백제의 정치문하적 영향력아래에 묶어 둔 것이다.
스다하치만신사: 일본국보 청동거울 '인물화상경' | 거울뒷면 9명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바같 둘레에는 제작년도를 알수 있는 48자의 글자가 있다.
거울을 받은 사람은 '남제왕'(계체천황) 이고, 보낸 사람은 '사마' 무령왕이다.
- 521년 무령왕의 한갑(60세)이었다.
양직공도: 6세기에 제작,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의 모습에 백제 사신이다. 무령왕의 국서를 전달 하였다. 핵심 9개단어.
누파고구려 갱위강국 : 여러번 고구려를 깨뜨렸으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
- 왜 5왕: 찬(리추),진(한제이),제(인교),흥(안코),무(유랴쿠) | 이 중 무왕이 곤지왕이다. 곤지왕(재위기간: 477-502) | 오오키미
- 523년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무령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 526년 무령왕이 죽고 3년후에 무령왕비(둘재부인,성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 무령왕릉 1971년 발견: 10시간만의 성급한 발굴, 3000개의 유물이 발견됨.
두께 2mm 금제관식, 금판을 오려붙여 만든 금제귀걸이, 왕비의 왼쪽팔목에서 발견된 은제팔찌(두마리의 용이 꼬리를 물듯 연결되어있음), 진묘수앞에 놓여진 묘지석이 있었다.
사비시대 | 538-660년 (122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523-554년 (31년) | 26대 성왕 | 명농,명,성명
- 성왕은 흠명천황과 동일인 이다
- 무령왕의 아들 |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 |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16관등제(귀족관료들의 상하 위계질서 확립), 22부제(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12부와 일반 서정을 관리하는 외관10부), 5부5항(사비도성의 도시를 5부로 나누고, 전국을 5항으로 나누었다)
- 540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전하여 왜국으로 망명하였고 왜국왕이 되었다. 540년이 킨메이 원년이 되는 것이다.
- 552년(또는 538년) 최초로 불교를 일본에 포교함. (긴메이천황: 538-571)
- 554년 전쟁중인 관산성(삼성산)으로 아들 창을 위로하러 가다가 신라의 장군 김무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함.
- 전사한 것이 아닌 일본으로 가서 (흠명천황,긴메이천황) 통치하고, 아들인 창이 위덕왕이 된다
554-598년 (44년) | 7대 위덕(창)왕 | 창
- 성왕의 장남, 30살의 나이로 즉위
- 성왕을 위한 '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됨)
- 562년 가야멸망
- 585년 비다쓰천황이 죽고, 부인인 스이코천황(39세)이 592년 즉위했다. (비다쓰(남편)-요메이(친오빠)-스슌(이복남매)-스이코)
비다쓰와 스이코는 이복남매였다. (아버지가 같음: 칸메이천황) 남매간 근친결혼
- 597년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불교와 제철기술을 갖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오우치가 임성태자의 후손이고. 1557년 멸문당하고 도요타씨로 성을 바꾸었다.
- 597년 아좌태자(의자왕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 아좌는 598년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598-599년 (1년) | 28대 혜왕 | 계
- 성왕의 차남
599-600년 (1년) | 29대 법왕 | 선,효순
- 혜왕의 아들
600-641년 (41년) | 30대 무왕 | 장,서동
- 무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를 배신하였던 신라를 12번 공격하였다.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갔다가 백제왕으로 다시 돌아와 무왕이 된다. 성왕의 셋째아들.
- 611년3월2일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일본 양마구치현에 상륙해 쇼토쿠태자에게 다타라씨라는 성씨와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 다타라씨는 오우치가 됐고 무역을 독점하면서 열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한다
- 시조 임성태자: 다타라-오우치-도요타
- 무왕이 지모밀지(지마마지는 익산의 옛이름) 로 천도하여 사찰을 짓고 경영하였다. - 관세음응험기
- 무왕의 출생지: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부여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광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서동이라 했다. - 삼국유사
무왕은 익산에서 자랐다. 익산은 무왕의 성장과정에 연결되고,
- 왕궁평성, 동서 234m, 남북으로 493m 이다.
- 630년 익산(금마저)천도계획: 왕궁과 미륵사를 만듦. (일본 서명천황이 천도를 적극 도와줌) , 서명천황 = 의자왕, 익산 -> 사비 천도는 의자왕의 의지였다. 왕궁사 5층목탑은 천도후 궁터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왕궁사 5층석탑에서 금동으로 만들어진 사리내함이 발견되었고, 그안에 녹색내함 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청동사리외함안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내함 안에서 금제금강경이 발견되었다. 19장의 금판이 2줄의 금띠에 묶여 있었는데 마치 금으로 만든 책 같았다.
금제불강경의 글자체는 정영화 되기 전의 글씨체이다. 7세기초반(무왕초기) 글씨체이다.
청동여래입상, 같은 5층석탑 기단에서 신라시대 청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미륵사 목탑 65m , 32판축기법으로 만들어졌고, 이 목탑은 무왕40년(639년)11월 벼락으로 제석사가 불에 타 유실되었다 - 관세음응험기(일본) -> 원래 금제금강경와 녹색사리병이 안치되었던 목탑이다. 제석사가 불타서 현재의 왕궁리로 옮겨 온 것이다.
제석사의 유실된 목탑의 주출돌 위에 현재 왕궁리 5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안에 청동여래입상을 봉안한 것이다.
- 수부 = 수도 (중앙정부, 왕이 머무는 지명 | 5부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 수부(왕이 머무는 곳)
- 무왕31년(630년) 2월에 사비(부여)성을 고치고, 왕이 웅진(공주)성으로 행차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에 부역을 정지하고 왕은 웅진에서 돌아왔다 - 삼국사기
사비세력과 익산세력의 정치적 대립에 사비세력이 익산세력을 물리쳤다. 의자왕은 무왕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는데, 어버이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 삼국사기
- 무왕은 익산에 묻혔다.
- 무왕의 딸 제명공주(사이메이천황), 시집을 갖다가 아들을 하나 나앟고, 남편은 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리고 의자왕과 결혼을 한다.
641-660년 (19년) | 31대 의자왕 | 의자
무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 641년 40세에 의자왕에 등극한다.
아내: 제명공주(제명천황,소이메이천황)와 결혼, 제명공주는 무왕의 딸
- 의자왕은 서명천황(조메이) 이다.
- 641년 조메이 천황(629-641) 사망, 의자왕과 조메이는 동일인 가능성 높음.
- 642년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검일의 아내(고타소,김춘추의 딸)를 빼았고,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백제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품석과 김춘추의 딸의 목을 베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것을 맹세했다.
- 의자왕 제위기간 20년동안 신라를 10번 공격하여 전쟁 하였다.
- 645년6월12일 소아입록(소아씨) , 판개궁에서 중대형과 중신겸족에 의해 살해당함 (대화개신)
중대형은 천지천황이 된다. 663년 백제에 파병을 보낸 천황이다. 의자왕의 아들 풍과 함께 신라와 싸운 영웅이었던 것.
신라에 배신감과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친당정책을 했던 소아씨를 살해한 것이다. 일본에게는 나라를 세웠지만 백제에게는 또 다른 배신자였던 것.
백제는 일라를 덕이에게 시켜 살해했다. 일라는 왜의 사신(40년간)으로 백제가 왜에 나라를 세우는 계획을 방해했다.
- 의자왕이 중신겸족(내대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에게 바둑판을 보냈다. 일본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 660년6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명, 신라 김유신의 5만에 의해 멸망됨
소정방이 정림사 5층석탑에 쓴글: 대당평백제국비명 | 백제는 250현에 24만호수를 가졌으며 인구는 620만이다
- 웅진성, 예식장군(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였다. 예식은 당나라 종3품 금위군 대장군이 되었다.
- 흑치상지는 당나라로가 장군이 되어 30년간 불패의 장군으로, 종3품 대장군이 되었다.
- 의자왕의 증손녀, 융의 손녀가 당나라의 왕비(괵왕(이옹)의 부인)가 되었다. 부여태비 690 (의자왕-부여융-부여덕장-부여태비)
661-663년 (2년) | 32대 풍왕 | 풍, 풍장
의자왕의 아들
- 풍은 왜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661년 백제로 돌아와 왕(풍왕)이 되었다.
- 661년 소이메이천황(여왕)이 죽고 중대형이 천지천황이 되었다. 천지천황은 상복을 입은체 전쟁을 계속준비한다. 7년후 왕위계승.
- 661년 신라 김춘추(무열왕)가 죽었다.
- 661년9월 부여풍은 왜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왔다. (5000명의 군사를 동반)
- 662년3월 부여풍이 '백제 왕'으로 인정받고, 5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한다. | 풍왕
- 632년 익산으로 천도 좌절
- 663년8월27일 당 수군 170척과 이호하라노 기미오미가 이끄는 1만여명의 왜군이 1차 전투를 벌였다. 왜군이 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28일 다시 왜의 본군과 당 수군 사이에 2차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4차례 접전 끝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패배하였다.
백제 ,왜 연합군은 나당 수군의 화공과 협공에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고, 400척이 불타버렸다. 풍왕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마침내 9월7일 왕자 부여충승등이 왜군과 함께 항복하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 663년8월 백강구전투 패전으로 백제부강 실패 | 백제와 왜국 vs 신라와 당나라 연합 아버지의 나라 백제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파병이었다.
- 부여풍장이 천무천황이 되었다.
- 천지천황(중대형)은 667년 교토로 천도하고,668년1월7 천황 즉위식을 하고, 670년 왜 -> 일본 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671년 천지천황이 죽고, 673년2월27일 천무천황이 즉위한다. 그는 국호를 일본으로 확정하고 군주의 명칭인 대왕을 천황으로 바꿨다. 686년9월9일 천무천황은 병으로 죽었다.
663년 ~
- 680년 백제의 흑치상지가 토번을 물리쳤다.
- 사타충의, 당나라 궁성을 지키는 호위장군
- 8세기 난원경, 절충도위가 되었다.
- 당나라 수도 장안성 호위, 순장군
- 백제 왕족이 이전받았다. 백제인의 직위가 올라갈 수록 백제 왕족의 지위가 올라갔다. 건안고성에서 백제가 다시 일어났다.
- 당황제가 바뀌자 이옹(당황제증손자)이 숭국부인을 죽이고, 왕위를 물러난뒤 백제의 왕족 부여태비(22)와 결혼해 괵왕에 복귀하게 된다. 부여태비는 49에 죽고, 맏아들 이거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 건안고성을 부여융이 대방군왕으로 다스렸고, 건안고성이 사라졌을때(당은 발해에 멸망) 백제의 씨가 사라졌다.
- 성왕은 흠명천황과 동일인 이다
- 무령왕의 아들 |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 |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16관등제(귀족관료들의 상하 위계질서 확립), 22부제(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12부와 일반 서정을 관리하는 외관10부), 5부5항(사비도성의 도시를 5부로 나누고, 전국을 5항으로 나누었다)
- 540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전하여 왜국으로 망명하였고 왜국왕이 되었다. 540년이 킨메이 원년이 되는 것이다.
- 552년(또는 538년) 최초로 불교를 일본에 포교함. (긴메이천황: 538-571)
- 554년 전쟁중인 관산성(삼성산)으로 아들 창을 위로하러 가다가 신라의 장군 김무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함.
- 전사한 것이 아닌 일본으로 가서 (흠명천황,긴메이천황) 통치하고, 아들인 창이 위덕왕이 된다
- 554-598년 (44년) | 7대 위덕(창)왕 | 창
- 성왕의 장남, 30살의 나이로 즉위
- 성왕을 위한 '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됨)
- 562년 가야멸망
- 585년 비다쓰천황이 죽고, 부인인 스이코천황(39세)이 592년 즉위했다. (비다쓰(남편)-요메이(친오빠)-스슌(이복남매)-스이코)
비다쓰와 스이코는 이복남매였다. (아버지가 같음: 칸메이천황) 남매간 근친결혼
- 597년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불교와 제철기술을 갖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오우치가 임성태자의 후손이고. 1557년 멸문당하고 도요타씨로 성을 바꾸었다.
- 597년 아좌태자(의자왕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 아좌는 598년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칠지도: 372년 근초고왕이 손자 침을 왜왕으로 보내며 칠지도를 하사하였고, 408년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현존)
- 성왕의 차남
- 혜왕의 아들
- - 무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를 배신하였던 신라를 12번 공격하였다.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갔다가 백제왕으로 다시 돌아와 무왕이 된다. 성왕의 셋째아들.
- 611년3월2일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일본 양마구치현에 상륙해 쇼토쿠태자에게 다타라씨라는 성씨와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 다타라씨는 오우치가 됐고 무역을 독점하면서 열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한다
- 시조 임성태자: 다타라-오우치-도요타
- 무왕이 지모밀지(지마마지는 익산의 옛이름) 로 천도하여 사찰을 짓고 경영하였다. - 관세음응험기
- 무왕의 출생지: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부여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광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서동이라 했다. - 삼국유사
무왕은 익산에서 자랐다. 익산은 무왕의 성장과정에 연결되고,
- 왕궁평성, 동서 234m, 남북으로 493m 이다.
- 630년 익산(금마저)천도계획: 왕궁과 미륵사를 만듦. (일본 서명천황이 천도를 적극 도와줌) , 서명천황 = 의자왕, 익산 -> 사비 천도는 의자왕의 의지였다. 왕궁사 5층목탑은 천도후 궁터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왕궁사 5층석탑에서 금동으로 만들어진 사리내함이 발견되었고, 그안에 녹색내함 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청동사리외함안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내함 안에서 금제금강경이 발견되었다. 19장의 금판이 2줄의 금띠에 묶여 있었는데 마치 금으로 만든 책 같았다.
금제불강경의 글자체는 정영화 되기 전의 글씨체이다. 7세기초반(무왕초기) 글씨체이다.
청동여래입상, 같은 5층석탑 기단에서 신라시대 청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미륵사 목탑 65m , 32판축기법으로 만들어졌고, 이 목탑은 무왕40년(639년)11월 벼락으로 제석사가 불에 타 유실되었다 - 관세음응험기(일본) -> 원래 금제금강경와 녹색사리병이 안치되었던 목탑이다. 제석사가 불타서 현재의 왕궁리로 옮겨 온 것이다.
제석사의 유실된 목탑의 주출돌 위에 현재 왕궁리 5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안에 청동여래입상을 봉안한 것이다.
- 수부 = 수도 (중앙정부, 왕이 머무는 지명 | 5부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 수부(왕이 머무는 곳)
- 무왕31년(630년) 2월에 사비(부여)성을 고치고, 왕이 웅진(공주)성으로 행차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에 부역을 정지하고 왕은 웅진에서 돌아왔다 - 삼국사기
사비세력과 익산세력의 정치적 대립에 사비세력이 익산세력을 물리쳤다. 의자왕은 무왕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는데, 어버이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 삼국사기
- 무왕은 익산에 묻혔다.
- 무왕의 딸 제명공주(사이메이천황), 시집을 갖다가 아들을 하나 나앟고, 남편은 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리고 의자왕과 결혼을 한다.
무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 641년 40세에 의자왕에 등극한다.
아내: 제명공주(제명천황,소이메이천황)와 결혼, 제명공주는 무왕의 딸
- 의자왕은 서명천황(조메이) 이다.
- 641년 조메이 천황(629-641) 사망, 의자왕과 조메이는 동일인 가능성 높음.
- 642년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검일의 아내(고타소,김춘추의 딸)를 빼았고,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백제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품석과 김춘추의 딸의 목을 베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것을 맹세했다.
- 의자왕 제위기간 20년동안 신라를 10번 공격하여 전쟁 하였다.
- 645년6월12일 소아입록(소아씨) , 판개궁에서 중대형과 중신겸족에 의해 살해당함 (대화개신)
중대형은 천지천황이 된다. 663년 백제에 파병을 보낸 천황이다. 의자왕의 아들 풍과 함께 신라와 싸운 영웅이었던 것.
신라에 배신감과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친당정책을 했던 소아씨를 살해한 것이다. 일본에게는 나라를 세웠지만 백제에게는 또 다른 배신자였던 것.
백제는 일라를 덕이에게 시켜 살해했다. 일라는 왜의 사신(40년간)으로 백제가 왜에 나라를 세우는 계획을 방해했다.
- 의자왕이 중신겸족(내대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에게 바둑판을 보냈다. 일본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 660년6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명, 신라 김유신의 5만에 의해 멸망됨
소정방이 정림사 5층석탑에 쓴글: 대당평백제국비명 | 백제는 250현에 24만호수를 가졌으며 인구는 620만이다
- 웅진성, 예식장군(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였다. 예식은 당나라 종3품 금위군 대장군이 되었다.
- 흑치상지는 당나라로가 장군이 되어 30년간 불패의 장군으로, 종3품 대장군이 되었다.
- 의자왕의 증손녀, 융의 손녀가 당나라의 왕비(괵왕(이옹)의 부인)가 되었다. 부여태비 690 (의자왕-부여융-부여덕장-부여태비)
- 부여융: 대방군왕 , 백제왕으로서 건안고성을 통치했다. | 건안고성을 백제라고 불렀다.
- 사타충의: 당나라 궁성호위대 장군 | 당나라 궁성을 지키는 호위장군
- 난원경: 절충도위 | 당나라에서 태어나 8세기초에 활약하며 절충도위를 지냈다.
- 순장군: 당나라 수도 장안성 호위
의자왕의 아들
- 풍은 왜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661년 백제로 돌아와 왕(풍왕)이 되었다.
- 661년 소이메이천황(여왕)이 죽고 중대형이 천지천황이 되었다. 천지천황은 상복을 입은체 전쟁을 계속준비한다. 7년후 왕위계승.
- 661년 신라 김춘추(무열왕)가 죽었다.
- 661년9월 부여풍은 왜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왔다. (5000명의 군사를 동반)
- 662년3월 부여풍이 '백제 왕'으로 인정받고, 5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한다. | 풍왕
- 632년 익산으로 천도 좌절
- 663년8월27일 당 수군 170척과 이호하라노 기미오미가 이끄는 1만여명의 왜군이 1차 전투를 벌였다. 왜군이 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28일 다시 왜의 본군과 당 수군 사이에 2차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4차례 접전 끝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패배하였다.
백제 ,왜 연합군은 나당 수군의 화공과 협공에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고, 400척이 불타버렸다. 풍왕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마침내 9월7일 왕자 부여충승등이 왜군과 함께 항복하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 663년8월 백강구전투 패전으로 백제부강 실패 | 백제와 왜국 vs 신라와 당나라 연합 아버지의 나라 백제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파병이었다.
- 부여풍장이 천무천황이 되었다.
- 천지천황(중대형)은 667년 교토로 천도하고,668년1월7 천황 즉위식을 하고, 670년 왜 -> 일본 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671년 천지천황이 죽고, 673년2월27일 천무천황이 즉위한다. 그는 국호를 일본으로 확정하고 군주의 명칭인 대왕을 천황으로 바꿨다. 686년9월9일 천무천황은 병으로 죽었다.
- 680년 백제의 흑치상지가 토번을 물리쳤다.
- 부여융: 건안고성을 부여융이 대방군왕으로 다스렸고, 백제왕으로서 건안고성을 통치했다. | 건안고성을 백제라고 불렀다. 건안고성이 사라졌을때(당은 발해에 멸망) 백제의 씨가 사라졌다. 667년부터 150년간 유지되었고 발해의 10대 대인수왕때 827년 백제가 발해에 의해 멸망하였다.
- 사타충의: 당나라 궁성호위대 장군 | 당나라 궁성을 지키는 호위장군
- 난원경: 절충도위 | 당나라에서 태어나 8세기초에 활약하며 절충도위를 지냈다.
- 순장군: 당나라 수도 장안성 호위
- 백제 왕족이 이전받았다. 백제인의 직위가 올라갈 수록 백제 왕족의 지위가 올라갔다. 건안고성에서 백제가 다시 일어났다.
- 당황제가 바뀌자 이옹(당황제증손자)이 숭국부인을 죽이고, 왕위를 물러난뒤 백제의 왕족 부여태비(22)와 결혼해 괵왕에 복귀하게 된다. 부여태비는 49에 죽고, 맏아들 이거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690년 부여태비가 태어나 738년 사망하였다. 그후 다섯 아이중 맏아들 이거가 괵왕을 이어받았다. 아들이 왕이 되면서 부여왕비에서 격상되어 부여태비가 되었다.
정릉사지 5층석탑:
탑의 비례: 1+5,2+4,3*2배 = 모두같음
1인치 기준: 고구려,백제 = 35 신라,당 = 29.8
석탑은 정북을 향해 만들어 졌는데, 진북방향에서 2.5도 서쪽으로 틀어져 있다( 357도32분). 북쪽을 정확히 찾을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별연구)
- 소정방: 대당평백 제국비명
궁남지 31자 목간 | 서부후항(주소를 뜻함) => 5부5방 | 동부,서부,중부,남부,북부,중부 | 동항,서항,중항,남항,북항 (상항,전항,중항,하항,후항)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죽은아들은 아좌태자 이다.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백제부흥운동 | 661-663년 (3년)
재위기간 순서 | 왕호| 휘
523-554년 (31년) | 26대 성왕 | 명농,명,성명
- 성왕은 흠명천황과 동일인 이다
- 무령왕의 아들 |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 |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16관등제(귀족관료들의 상하 위계질서 확립), 22부제(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12부와 일반 서정을 관리하는 외관10부), 5부5항(사비도성의 도시를 5부로 나누고, 전국을 5항으로 나누었다)
- 540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전하여 왜국으로 망명하였고 왜국왕이 되었다. 540년이 킨메이 원년이 되는 것이다.
- 552년(또는 538년) 최초로 불교를 일본에 포교함. (긴메이천황: 538-571)
- 554년 전쟁중인 관산성(삼성산)으로 아들 창을 위로하러 가다가 신라의 장군 김무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함.
- 전사한 것이 아닌 일본으로 가서 (흠명천황,긴메이천황) 통치하고, 아들인 창이 위덕왕이 된다
554-598년 (44년) | 7대 위덕(창)왕 | 창
- 성왕의 장남, 30살의 나이로 즉위
- 성왕을 위한 '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됨)
- 562년 가야멸망
- 585년 비다쓰천황이 죽고, 부인인 스이코천황(39세)이 592년 즉위했다. (비다쓰(남편)-요메이(친오빠)-스슌(이복남매)-스이코)
비다쓰와 스이코는 이복남매였다. (아버지가 같음: 칸메이천황) 남매간 근친결혼
- 597년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불교와 제철기술을 갖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오우치가 임성태자의 후손이고. 1557년 멸문당하고 도요타씨로 성을 바꾸었다.
- 597년 아좌태자(의자왕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 아좌는 598년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598-599년 (1년) | 28대 혜왕 | 계
- 성왕의 차남
599-600년 (1년) | 29대 법왕 | 선,효순
- 혜왕의 아들
600-641년 (41년) | 30대 무왕 | 장,서동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갔다가 백제왕으로 다시돌아와 무왕이 된다. 성왕의 셋째아들.
- 611년3월2일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일본 양마구치현에 상륙해 쇼토쿠태자에게 다타라씨라는 성씨와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 다타라씨는 오우치가 됐고 무역을 독점하면서 열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한다
- 시조 임성태자: 다타라-오우치-도요타
- 630년 익산(금마저)천도계획: 왕궁과 미륵사를 만듦. (일본 서명천황이 천도를 적극 도와줌)
- 무왕의 딸 제명공주(사이메이천황), 시집을 갖다가 아들을 하나 나앟고, 남편은 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리고 의자왕과 결혼을 한다.
641-660년 (19년) | 31대 의자왕 | 의자
무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 641년 40세에 의자왕에 등극한다.
아내: 제명공주(제명천황,소이메이천황)와 결혼, 제명공주는 무왕의 딸
- 의자왕은 서명천황(조메이) 이다.
- 641년 조메이 천황(629-641) 사망, 의자왕과 조메이는 동일인 가능성 높음.
- 642년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검일의 아내(고타소,김춘추의 딸)를 빼았고,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백제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품석과 김춘추의 딸의 목을 베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것을 맹세했다.
- 645년6월12일 소아입록(소아씨) , 판개궁에서 중대형과 중신겸족에 의해 살해당함 (대화개신)
중대형은 천지천황이 된다. 663년 백제에 파병을 보낸 천황이다. 의자왕의 아들 풍과 함께 신라와 싸운 영웅이었던 것.
신라에 배신감과 위기감을 느낀 백제는 친당정책을 했던 소아씨를 살해한 것이다. 일본에게는 나라를 세웠지만 백제에게는 또 다른 배신자였던 것.
백제는 일라를 덕이에게 시켜 살해했다. 일라는 왜의 사신(40년간)으로 백제가 왜에 나라를 세우는 계획을 방해했다.
- 의자왕이 중신겸족(내대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에게 바둑판을 보냈다. 일본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 660년6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명, 신라 김유신의 5만에 의해 멸망됨
- 웅진성, 예식장군(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였다. 예식은 당나라 종3품 금위군 대장군이 되었다.
- 흑치상지는 당나라로가 장군이 되어 30년간 불패의 장군으로, 종3품 대장군이 되었다.
- 의자왕의 증손녀, 융의 손녀가 당나라의 왕비(괵왕(이옹)의 부인)가 되었다. 부여태비 690 (의자왕-부여융-부여덕장-부여태비)
661-663년 (2년) | 32대 풍왕 | 풍, 풍장
의자왕의 아들
- 풍은 왜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661년 백제로 돌아와 왕(풍왕)이 되었다.
- 661년 소이메이천황(여왕)이 죽고 중대형이 천지천황이 되었다. 천지천황은 상복을 입은체 전쟁을 계속준비한다. 7년후 왕위계승.
- 661년 신라 김춘추(무열왕)가 죽었다.
- 661년9월 부여풍은 왜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왔다. (5000명의 군사를 동반)
- 662년3월 부여풍이 '백제 왕'으로 인정받고, 5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한다. | 풍왕
- 632년 익산으로 천도 좌절
- 663년8월27일 당 수군 170척과 이호하라노 기미오미가 이끄는 1만여명의 왜군이 1차 전투를 벌였다. 왜군이 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28일 다시 왜의 본군과 당 수군 사이에 2차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4차례 접전 끝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패배하였다.
백제 ,왜 연합군은 나당 수군의 화공과 협공에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고, 400척이 불타버렸다. 풍왕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마침내 9월7일 왕자 부여충승등이 왜군과 함께 항복하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 663년8월 백강구전투 패전으로 백제부강 실패 | 백제와 왜국 vs 신라와 당나라 연합 아버지의 나라 백제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파병이었다.
- 부여풍장이 천무천황이 되었다.
- 천지천황(중대형)은 667년 교토로 천도하고,668년1월7 천황 즉위식을 하고, 670년 왜 -> 일본 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671년 천지천황이 죽고, 673년2월27일 천무천황이 즉위한다. 그는 국호를 일본으로 확정하고 군주의 명칭인 대왕을 천황으로 바꿨다. 686년9월9일 천무천황은 병으로 죽었다.
663년 ~
- 680년 백제의 흑치상지가 토번을 물리쳤다.
- 사타충의, 당나라 궁성을 지키는 호위장군
- 8세기 난원경, 절충도위가 되었다.
- 당나라 수도 장안성 호위, 순장군
- 백제 왕족이 이전받았다. 백제인의 직위가 올라갈 수록 백제 왕족의 지위가 올라갔다. 건안고성에서 백제가 다시 일어났다.
- 당황제가 바뀌자 이옹(당황제증손자)이 숭국부인을 죽이고, 왕위를 물러난뒤 백제의 왕족 부여태비(22)와 결혼해 괵왕에 복귀하게 된다. 부여태비는 49에 죽고, 맏아들 이거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 건안고성을 부여융이 대방군왕으로 다스렸고, 건안고성이 사라졌을때(당은 발해에 멸망) 백제의 씨가 사라졌다.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왕흥사 사림함: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한 왕흥사 탑은 규암리 백마강터 뻘에서 발견 되었다.
642년 백제왕자 교기 및 동모매 여자 4인, 40여 사람이 왜로 갔다.
일본에 있던 여용이 백제로 간 여풍을 도왔다. | 663년 백촌강 전투, 병사 27000명 보냄
지면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건물 전체가 지면에서 높이 들어올려져 지어졌다. 이렇게 건물을 땅에서 들여 올리는 양식을 고상식 이라고 부르며,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까지 흔한 형태였다. 긴 건물이기 때문에 북창,중창,남창으로 분류한다.
정창언은 729-749년 사이 창건되었다.
1급보물 목화자단기국,
45대 쇼무천황의 유품: 숟가락,칼,거울,무기,목칠공예품,악기등 애장품 600여종과 황실의 보물을 보관한다
1년에 한번 가을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선발적으로 볼 수잇다.
한반도 삼국시대의 유물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으며, 신라 민정문서, 신라에서 일본으로 수입한 물품 리스트, 통일신라의 악기인 신라금, 비파,유리그릇,유리접시,양탄자,숟가락(천년동안 포장그대로 보관),인삼,먹등 있고, 면류관과 관련 의복들이 있다.